소장기록

제목[1988.11.04] 5공 청문회


설명1988년 6월 27일 구성된 ‘5공비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는 7월 23일 4당 간사회의를 열고 산하에 4개의 소위원회를 두어 각 분야별 비리를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제1소위원회는 정치권력에 의한 비리, 제2소위원회는 경제비리, 제3소위원회는 인권 및 인사 비리, 제4소위원회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게 되었고 전체 위원장은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의원이 맡았다. 조사대상은 1차로 일해재단(日海財團), 새세대 심장재단, 새마을본부, 전두환일가 해외재산도피, 연희동사저, 노량진수산시장비리, 국제그룹 등의 부실기업정리, 삼청교육대, 미국 노스럽사(社) 전투기도입 스캔들 등 44건이 선정되었다. 1988년 11월 2일 일해재단 관련비리 조사를 위한 1차 청문회가 열려 ①일해재단이 사실상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 후 사용하기 위해 호화시설을 한 점, ②청와대 경호실이 각종 기금모금과 관리에 깊이 개입한 점, ③589억 원의 기금을 거둬들인 과정 등을 밝혀냈다. 그후 수차례의 청문회가 거듭되었지만 속시원한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1989년 2월 13일 여당인 민정당이 5공비리특위의 종결방침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불참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들은 5공비리특위를 계속 강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중간평가에 따른 각당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거듭하였다. 결국 1989년 3월 22일 청문회의 무기한 연기가 결정되면서 5공비리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89년 여야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5공비리특위는 전두환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989년 12월 31일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대통령은 5공비리에 대한 직접개입을 전면부인하고 변명성 발언으로 일관함으로써 5공비리의 진상은 역사적 미제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큰 성과없이 5공비리특위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결국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5공비리 사건은 1988년 12월 10일 발족한 ‘5공비리 특별수사부’의 수사를 통해 전경환을 비롯한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10명과 장세동 전안기부장, 이학봉 전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모두 47명이 구속되고 29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5공비리특별위원회 [五共非理特別委員會] (두산백과)


날짜1988.11.04


참고자원위키백과


참고자원URLhttps://ko.wikipedia.org/wiki/%EC%A0%9C5%EA%B3%B5%ED%99%94%EA%B5%AD_%EC%B2%AD%EB%AC%B8%ED%9A%8C


연표구분노태우 정권


관련인물조직KC-O-00004


식별번호KC-Y-0060


제목[1988.11.04] 5공 청문회


설명1988년 6월 27일 구성된 ‘5공비리 특별위원회(5공비리특위)’는 7월 23일 4당 간사회의를 열고 산하에 4개의 소위원회를 두어 각 분야별 비리를 조사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제1소위원회는 정치권력에 의한 비리, 제2소위원회는 경제비리, 제3소위원회는 인권 및 인사 비리, 제4소위원회는 사회 및 기타 비리를 다루게 되었고 전체 위원장은 통일민주당의 이기택 의원이 맡았다. 조사대상은 1차로 일해재단(日海財團), 새세대 심장재단, 새마을본부, 전두환일가 해외재산도피, 연희동사저, 노량진수산시장비리, 국제그룹 등의 부실기업정리, 삼청교육대, 미국 노스럽사(社) 전투기도입 스캔들 등 44건이 선정되었다. 1988년 11월 2일 일해재단 관련비리 조사를 위한 1차 청문회가 열려 ①일해재단이 사실상 전두환 대통령의 퇴임 후 사용하기 위해 호화시설을 한 점, ②청와대 경호실이 각종 기금모금과 관리에 깊이 개입한 점, ③589억 원의 기금을 거둬들인 과정 등을 밝혀냈다. 그후 수차례의 청문회가 거듭되었지만 속시원한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1989년 2월 13일 여당인 민정당이 5공비리특위의 종결방침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불참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들은 5공비리특위를 계속 강행하기로 합의하였으나 중간평가에 따른 각당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난항을 거듭하였다. 결국 1989년 3월 22일 청문회의 무기한 연기가 결정되면서 5공비리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1989년 여야합의에 따라 일시적으로 활동을 재개한 5공비리특위는 전두환 대통령을 증인으로 채택한 청문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1989년 12월 31일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대통령은 5공비리에 대한 직접개입을 전면부인하고 변명성 발언으로 일관함으로써 5공비리의 진상은 역사적 미제로 남게 되었다. 이로써 큰 성과없이 5공비리특위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결국 전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5공비리 사건은 1988년 12월 10일 발족한 ‘5공비리 특별수사부’의 수사를 통해 전경환을 비롯한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 10명과 장세동 전안기부장, 이학봉 전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모두 47명이 구속되고 29명이 불구속 입건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5공비리특별위원회 [五共非理特別委員會] (두산백과)


날짜1988.11.04


자원유형연표


참고자원위키백과


참고자원URLhttps://ko.wikipedia.org/wiki/%EC%A0%9C5%EA%B3%B5%ED%99%94%EA%B5%AD_%EC%B2%AD%EB%AC%B8%ED%9A%8C


연표구분노태우 정권


관련인물조직KC-O-00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