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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형 선생님의 저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바탕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까지 한국의 상황과 IMF와의 협상 과정, 구제금융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살펴봅니다. 

정부는 은행의 대외채무에 대해 대한민국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금융안정대책을 내놓았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이미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국제 투자자와 채권자들의 투기 공격, 투자자 패닉, 뱅크런 때문에 금융위기가 빠르게 확산되었고, 10월 23일에는 홍콩 주식시장이 10.4% 대폭락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원화의 가치도 10월 말부터 폭락했다.

홍콩 주식시장이 폭락한 이후 2주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정부의 고위관료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 원화가 2.25퍼센트의 일일 등락 한도를 넘어 폭락함에 따라 외환거래가 중지되었다.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모건 스탠리, 《월스트리트저널》, 블룸버그 통신, 페레그린 증권 등은 한국의 외환보유고와 외채에 대해 부정적인 메시지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 “지금 당장 한국을 탈출하라 Get out of Korea, right now”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의 단기 대외부채는 정부가 발표했던 공식 외환보유고 305억달러를 훨씬 초과하는 미화 660억 달러로 평가되고 있었다.

외환 사정이 심각해짐에 따라 정부 관료들은 IMF 구제금융 신청도 하나의 대안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11월 7일 정부는 ‘외환위기대응을 위한 경제비서실, 재경원, 한국은행 관계관 회의’를 연다. 회의에서 한국은행은 〈외화유동성 사정과 대응 방안〉이라는 보고자료를 제출하였고, 이 보고서에서 IMF구제금융 신청이 처음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으로 알려진다.

(사진출처: 김인호 홈페이지)

하지만 “IMF로 간다”는 것은, 단순히 국제기구의 돈을 빌린다는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IMF는 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해당 국가의 ‘경제 개혁’을 강제할 수 있었다. 이는 한국의 경제정책과 구조가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과 속도로, IMF의 지시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또한 한 국가가 위기를 관리하지 못해 IMF의 돈을 빌린 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국가신용도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밖에 없었다.

11월 9일 강경식 부총리, 윤증현 금융정책실장 등 재경원 고위관료들과 김인호 대통령 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총재 등이 모여 내부적으로 ‘그랜드 디자인’이라고 불린 총체적인 외환위기 극복 프로그램을 논의했다. 정부는 IMF 구제금융 신청을 최후의 방안으로 염두 해두면서, IMF로 가지 않을 수 있는 다른 해결책을 강구한다.

정부가 IMF행 이전에 시도해보려고 했던 위기해결 방법은 ①한국은행과 외국 중앙은행간의 통화스와프를 통해 외환을 확보하는 것, ②정부가 보증하는 채권(ABS)을 해외시장에서 발행하는 것, ③우방국인 미국과 일본 등에서 돈을 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11월 3일부터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무서운 속도로 고갈되고 있었고, 7일에는 가용외환이 1달 반 정도의 수입대금을 치를 정도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떨어져있는 상황이었다. 통화스와프를 추진하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마지막 방안으로 생각했던 ABS 발행 역시 부족한 외환을 충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 일본, 중국 등과 양자협상을 하여 돈을 빌리는 것 역시 모두 명분이 없다거나 자국 사정도 어렵다며 거절당한다.

당시 한국 정부가 희망의 끈으로 생각했던 또 한 가지 방안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일본 주도로 설립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아시아통화기금 Asia Monetary Fund (AMF)을 통해 긴급융자를 받는 것이었다. 1997년 3월경 일본 대장성(현 재무성) 재무관(차관) 사카키바라가 입안한 AMF의 목적은 1994년 12월 멕시코 페소화 폭락과 같은 통화위기가 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할 경우 이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있었다.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요구되는 정책개혁 조건을 더 융통성 있게 적용해, 혹독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IMF 구제금융 없이도 위기를 수습하자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동남아 위기가 진행 중인 9월 21일 홍콩의 IMF·IBRD 연차총회에서 미쓰즈카 대장상은 이 구상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는데, 그 전에 미리 귀띔을 받은 강경식 부총리도 이에 적극 찬성하며 사무국을 서울에 설치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었다. 그 역시 가능하다면 IMF나 IMF의 최대지분국인 미국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구조조정을 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AMF의 성공을 위해 지지를 받아야 했던 미국과 중국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특히 미국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주도적 역할이 약화되고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AMF가 IMF로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할 경우 금융시장의 확장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 마찬가지로 IMF 측도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AMF가 대체금융 자금을 제공한다면 금융위기로 어려운 상황에 빠진 아시아 국가에 경제개혁을 독려하는 IMF의 독점적 지위가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미국 재무부는 일본에 AMF 창설 계획을 포기하고 오직 IMF의 틀 안에서만 한국을 지원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11월 12일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APEC 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자 회의에서도 AMF에 대한 서방 국가들의 반대가 거셌다. 마침내 11월 14일 미쓰즈카 대장상은 “국제금융기관 가운데 세계금융안정에 중심 역할을 하는 것은 IMF이고 AMF는 IMF를 보조해야한다”면서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말았다.

IMF의 ‘긴급fast track’ 구제금융 패키지만이 유일하게 남은 수단이었다.

정부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IMF와 11월 9일부터 접촉을 진행하고 있었다. 마침 ‘그랜드디자인’ 대책회의 이후 밤늦게 귀가한 강경식 부총리에게 스탠리 피셔Stanley Fischer IMF 수석 부총재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남아시아 순방 중인 미셸 캉드쉬 Michel Camdessus IMF 총재를 비밀리에 만나보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강경식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금융시장 불안정으로 IMF로 갈 수도 있다고 구두로 보고한다. 그리고 그는 그날 정오 김기환 대외경제협력담당 특별대사를 만나 캉드쉬 IMF 총재를 만날 것을 지시한다.

11월 13일 밤 강경식, 김인호 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최종 결정하고, 다음 날 김영삼 대통령에게 이를 재가받는다. 캉드쉬를 만나기 위해 태국의 환태평양경제협의회에 참석 중이던 김기환은 강경식으로부터 밀명을 받고 14일 캉드쉬를 찾아가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방한을 요청했다.

캉드쉬 IMF 총재는 휴버트 나이스Hubert Neiss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을 대동하고 11월 16일 오후 3시 반 극비리에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서울 인터콘티넨털 호텔 스위트룸으로 향해 6시 반부터 강경식 부총리 및 이경식 총재와 회담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강경식과 캉드쉬는 3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1차분 연내 지원), 11월 19일 IMF 구제금융 공식 요청 발표, 11월 20일 IMF 실사단 제1진 파견 등에 잠정 합의했다. 캉드쉬가 마지막에 유력 대통령 후보(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세 사람 모두가 당선된 뒤 협정을 지키겠다고 각서를 써야만 IMF 이사회에 안건을 올릴 수 있다고 못 박자 강경식도 이에 동의했다.

11/17 인터콘티넨탈호텔 secret meeting 회의내용 수첩

11/17 인터콘티넨탈호텔 secret meeting 회의내용 수첩

IMF측과의 대화내용

IMF측과의 대화내용

MISSION 명단 및 활동 스케줄 관련 보고

MISSION 명단 및 활동 스케줄 관련 보고

코스피(KOSPI) 주가지수 500선이 붕괴된 11월 17일 오후, 엄낙용 차관보는 아시아 지역 금융협력회의(재무차관 회의) 참석차 마닐라로 출국했다. 이 회의에는 사카키바라 일본 대장성 차관,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 피셔 IMF 수석 부총재 등도 참석했는데, 서머스와 사카키바라는 강경식과 캉드쉬의 회동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IMF와 미국, 일본은 극비 정보를 공유하는 매우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었으며 ‘IMF틀 안에서의 지원’이라는 원칙에 이미 합의한 상태였다. 이날 저녁 엄낙용은 IMF를 통해서만 한국을 지원하겠다는 미국과 일본의 입장을 국제전화로 보고했다.

11월 19일, 이날은 강경식이 루빈 미 재무장관과 통화하기로 약속한 날이자 IMF행을 발표하기로 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강경식은 5시 기자회견에서 질의응답 형식으로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화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경제수석을 경질했다. 그 전날 있었던 강경식 부총리의 금융개혁법안 처리 실패와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을 묻는 조치였다. 강경식은 외환위기의 와중에도 근본적인 개혁조치가 국제금융시장 및 IMF의 신뢰를 제고할 수 있다고 믿고 법안 통과에 총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가 임박한 정치적 상황에서 국회는 법안을 처리하지 않은 채 폐회했다.

경질 후 강경식은 루빈 미 재무장관과 약속된 통화를 하기 위해 과천 청사로 향했다. 그는 루빈에게 자신은 경질되었지만 IMF행에 대한 정부방침이 변경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고 나서 그는 후임자에 대한 업무 인수인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관련기사] 매일경제 97년 11월 20일자 1면

97-06-16 정부의 금융개혁안에 관한 의견서

97-06-16 정부의 금융개혁안에 관한 의견서

한편 김영삼 대통령은 강경식과 김인호의 후임으로 임창렬 통상산업부 장관과 김영섭 관세청장을 경제부총리와 경제수석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 IMF행을 발표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신임 임창렬 부총리는 오후 6시 기자회견에서“IMF 구제금융 신청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국채발행과 중앙은행 간 통화스와프 추진을 발표하면서, “국제금융계가 협력하면 IMF 자금지원 없이도 외환위기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밤 다른 고위 경제관료들과 IMF 자금 요청 이외에 다른 대안을 모색해봐도 뾰족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앞서 보았듯 다른 대안은 이미 막힌 상태였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IMF를 통해서만 한국을 지원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신임 부총리가 IMF 지원 없이 외환위기를 해결해보겠다고 나서자 IMF와 미국이 보기에 한국은 약속을 파기하고 IMF행을 거부한 것이 되어버렸다. 워싱턴의 IMF 실사단도 한국으로 출국하려던 일정을 취소했다. 임창렬 부총리, 강만수 차관, 이경식 한은 총재 등은 IMF행의 불가피성을 느끼면서도 이미 직접 지원을 거절했던 일본에 다시 한 번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처럼 한국 측이 예상외로 말을 듣지 않자 마침내 미국 루빈 재무장관이 직접 나섰다. 임창렬이 IMF행을 부인하고 난 다음 날이자 외환거래가 4일째 중단된 11월 20일, 루빈은 “한국이 현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금융제도를 강화할 수 있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신속히 취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그날 오후 한국의 IMF 구제금융 신청을 예상해 한국에 들어와 있던 가이트너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임창렬에게 보냈다. 가이트너는 임창렬에게 “한국이 현 금융위기를 넘기려면 IMF의 자금 지원을 받는 수밖에 없다. 미국은 IMF를 통하지 않고 양자 지원을 통해 한국을 도울 수는 없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피셔 IMF 부총재도 그날 저녁 임창렬을 만나 IMF행을 종용했다. 그제야 임창렬은 IMF행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회고한 대로 ‘외통수’였던 것이다(《서울경제》, 2007년 2월 19일). 임창렬 부총리는 다음날인 11월 21일 오전, 이미 결정이 났던 IMF 구제금융 신청을 다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같은 날 오전 그는 피셔 부총재를 만나 IMF 자금 지원 요청의사를 밝히고, 밤 10시 세종로 정부청사 대회의실에서 IMF 구제금융 신청을 공식 발표했다.

국제통화기금 유동성조절자금 지원요청

국제통화기금 유동성조절자금 지원요청

외환위기의 발생 및 구제금융 협상과정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 2011) 5장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 (1) IMF 협상과 지구적 위기관리의 정치경제학’의 분석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링크를 통해 저서의 전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