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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형 선생님의 저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바탕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까지 한국의 상황과 IMF와의 협상 과정, 구제금융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살펴봅니다. 

국가부도가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 IMF와 한국 정부의 협상은 직접적으로는 통화·재정 등의 거시경제정책과 기업, 금융, 노동개혁 등 구제금융의 조건을 중심으로, 간접적으로는 한국 정부와 미국, 유럽, 일본의채권자들과의 채무 만기연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IMF와의 협상은 단발성이 아니라 1997년 1월부터 1998년 1월까지 세 시기의 국면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IMF 대기성차관협약(Stand-by Arrangement)—제1차 협상 (1997년 11월 23일~12월 3일)

11월 23일 IMF 실사단이 입국하여 한국의 경제 현황을 파악하기 시작하고 26일 IMF 아시아 태평양 담당 국장을 대표로 하는 협상단이 입국함으로써 제1차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에서의 한국 정부의 위치는 이미 매우 취약했다. 11월 27일 김영섭 경제수석이 대통령에게 ‘국가부도’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고할 정도로 외환보유고는 거의 고갈 상태였다(김영섭 2007). 1997년 11월 26일 공식 외환보유액은 242억 달러, 연내 가용 보유외환은 92억 달러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알려진 1,200억 달러의 외채 중에서 절반 이상이 만기 1년 이하의 단기부채였으며, 그중 3분의 1은 1997년 말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상황이었다. 위기는 워낙 급속하게 전개되어 “상황은……날마다가 아니라 매 시간마다 악화되었다”(Ministry of Finance and Economy 1999, 14쪽). 더구나 한국 경제가 대부분의 에너지와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했기 때문에, 한국의 관료들은 채무불이행default이나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은 거의 생각해볼 수도 없는 대안으로 여겼다.

IMF 협의 대응 기본입장

IMF 협의대응 기본입장

ms. Lisaaker 면담결과

ms. Lisaaker 면담결과

힌편 11월 28일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협상을 빨리 마무리하라고 압박했다. 클린턴은 한국의 재무 상태가 극도로 심각하며, 이르면 다음 주말경 국가부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고 들었다면서, 한국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하고 현실적인 길은 늦어도 12월 1일 이전에, 신뢰를 회복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IMF와 합의하여 발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클린턴은 IMF 프로그램과 분리된 ‘브리지론’은 신뢰를 회복시키지 못하고 며칠 사이에 바닥날 수 있으니 한국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덧붙였다 (강만수 2005, 457∼458쪽 ; 김영섭 2007). 한국이 브리지론을 통해 여전히 IMF 프로그램을 회피하거나 IMF와의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 한다는 판단을 하고 제동을 건 것이다. 실제로 이날 저녁 임창렬 부총리는 도쿄에서 미쓰즈카 일본 대장상을 만나 브리지론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의 압력을 받은 일본 대장성은 오직 IMF를 중심으로 한 국제적 지원의 틀 안에서 일본 정부가 자금을 지원해줄 것이니 IMF와의 협상을 조속히 끝내라는 입장을 밝힐 뿐이었다. 11월 29일에는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을 형님으로 모시겠다던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클린턴 대통령과 통화 직후 김영삼 대통령은 강만수 재경원 차관에게 IMF와의 협상을 12월 초까지 끝내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강만수 차관이 수석단장을 맡고 정덕구 차관보가 실무 협상단 대표를 맡은 한국 협상단과 나이스 아시아태평양 담당 국장이 단장을 맡은 IMF 대표단의 본격적인 협상이 시작되었다.

schedule-Friday November 28, 1997

schedule-Friday November 28, 1997

예상 쟁점사항에 대한 논의자료

예상 쟁점사항에 대한 논의자료

하지만 한국정부와 IMF의 협상 내용에 대해서도 미국은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미국은 한국시장의 전면적이고 빠른 개방과 강도 높은 구조개혁을 원했고, 협상에 이 같은 조건을 IMF 협상안에 반영시키고자 했다.

미국 국무부는 협상이 시작되기 직전인 11월 26일 주한 미 대사관에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

켈리Margaret Kelly IMF 수석자문관은 한국과 협의될 IMF 패키지가 금융부문 개혁, 긴축적 통화정책, 한국 시장 개방 조치라는 세 가지 요소를 포함할 것이라고 화요일 우리에게 말했다(Department of State,“ Official Informal Number214”, 1997년 11월 26일).

워싱턴에서 이메일과 전화로 협상 경과를 모니터링하던 미국은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립턴 재무차관을 한국에 급파했다. 한국 측의 시장개방 및 개혁의지가 모호해보였고 IMF 대표단도 구조개혁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IMF가 보기에 구조개혁은 본래 IMF의 전문분야가 아닌데다가 당장의 금융 패닉을 해결하는 데도 별로 효과가 없었다. 더구나 IMF는 1997년 10월 보고서에서 한국 거시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는 평가까지 했었다(Blustein 2001, 117∼118·141∼143쪽).

World Economic Outlook October 1997 -2

97년 10월 IMF에서 발행한 세계경제전망 보고서. 98년 한국 경제성장률을 6%로 예측

립턴 차관은 11월 30일 한국에 도착하여 협상이 열리는 힐튼 호텔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 협상이 끝나는 12월 3일까지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IMF에서 8년간 근무했고 1993년부터 재무부에서 근무해온 립턴 차관의 주요 임무는 채권시장 개방과 외국인 주식투자한도 확대 등 금융 시스템 자유화에 대한 한국의 확실하고 구체적인 결의를 얻어내는 것이었다(Blustein 2001, 141∼145쪽).

립턴이 협상 장소에 머물면서 IMF를 통해 한국 측에 추가 요구를 제시하자 협상은 까다로워졌다. 임창렬 부총리는 한국이 정책 개입보다는 단순히 단기 부채를 갚을 외화가 급하게 필요한 상황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OECD 가입 이후에도 지지부진했던 개혁과 계속적인 IMF 회피 시도에 한국 측을 불신하던 미 재무부는 개방의 일정과 내용을 숫자로 확실하게 못 박아 두고 싶어 했다.

한국과 IMF·미국의 대립은 부실금융기관 폐쇄와 콜금리 인상 여부를 놓고 격화되었다. 한국 측은 부실금융기관의 폐쇄에 반대하고 회생에 중점을 두었으며 금리를 낮추고 싶어 했던 반면에 IMF와 미국은 부실금융기관의 즉각적인 폐쇄와 콜금리의 대폭 인상을 요구했다.

급속하게 전개되는 위기 속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협상에서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한국 측은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정덕구 재경원 차관보는 립턴 차관을 찾아가 협상에 개입하는 것에 강력히 항의해 숙소를 하얏트 호텔로 옮기게 했고, 협상단은 11월 30일 미합의 사항들에 대해 나이스 단장과 직접 담판을 벌여 비교적 유리한 조건에 잠정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부실종금사 11개 중 1개만 폐쇄하고 나머지는 회생 기회를 부여하고, 경제성장률도 3퍼센트대로 유지하며, 주식·채권시장 개방도 조기에 추진하되 기존의 개방 계획을 따른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합의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한국의 실질적 협상 상대는 IMF가 아니라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에는 IMF가 아니라 미국이 합의해야 협상이 끝나는 것이었다. 미국은 IMF의 최대 지분국이었고 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가지고 있었다.

Report on Informal Board Meeting

Report on Informal Board Meeting

12월 1일 한국과의 잠정 합의 내용에 대한 나이스 단장의 보고를 받은 캉드쉬 IMF 총재는 협상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자신이 직접 협상을 타결할 것이니 기다리라고 통고했다. 12월 2일에는 임창렬 부총리에 전화를 걸어 자신이 서울에 와서 직접 합의를 확정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같은 날 막다른 골목에 몰린 한국 측은 협상을 유리하게 타결 짓기 위해 부실 종금사를 대거 정리하라는 IMF의 선결 요구사항을 대폭 수용했다. 9개 종금사에 전격적으로 영업정지 명령이 내려졌다. 한국 측은 캉드쉬 총재가 으레 그렇듯 마지막에 합의문에 서명만 하는 요식 행위나 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재경원은 캉드쉬의 방한 일정을 기자회견, 협정식, 대통령 면담, G7 국가 대사와의 오찬 등의 형식적 행사들로 잔뜩 채워놓았다. 그러나 12월 3일 오전 서울에 도착한 캉드쉬가 이 일정표를 보자마자 한 말은 뜻밖에도 “나는 협상하기 위해 왔다 I’m here to negotiate”였다.

IMF 지원논의 진전상황 보고

Korea-Informal Restricted Session

캉드쉬는 한국을 방문하기 며칠 전부터 워싱턴의 IMF 고위관료들과 전화 회의를 통해 미국이 협상에 대단히 불만족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더구나 서울에 도착한 당일에는 루빈 재무장관의 전화까지 받았다.

12월 3일 오전 캉드쉬 총재는 임창렬 부총리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선후보의 IMF 프로그램 이행 보장 각서를 요청하여 당일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로부터 각서를 받았다. 오후에 캉드쉬는 종로구 세종로의 정부중앙청사 19층에 있는 임창렬 경제부총리 집무실로 옮겨 새로운 협상을 시작했다. 그는 콜금리 인상, 외국인 금융기관 인수 허용, 기업 인수합병 완전 자유화,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의 대폭 확대 등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리하여 수정된 새로운 합의가 도출되었으며 마침내 저녁 7시 25분 임창렬 부총리, 이경식 한은 총재, 캉드쉬 IMF 총재는 IMF 자금 지원 의향서Letter of Intent에 서명하고 같은 날 오후 10시 이 내용을 발표했다. 지원 자금 규모는 사상 최대인 583억 5,000만 달러로, IMF 지원금 210억 달러(대기성 자금 75억 달러, 보완준비금융 135억 달러), IBRD 100억 달러, ADB 50억 달러, 13개 국가의 2선 자금 233억 5,000만 달러로 구성되어 있었다. IMF 지원분 210억 달러는 그때까지 IMF가 단일 국가에 지원하기로 한 것으로는 최대 액수였다. 마침내 12월 5일 IMF 이사회에서 대기성 차관협약이 통과되어 한국은 한숨 돌리는 듯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한국 금융 및 상품시장의 개방과 외국인 투자자에 우호적인 제도개혁이 강제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 국회의장, 후보자 각서

대통령, 국회의장, 후보자 각서

Summary of Side Letter

콜금리 25%로 인상, 재정 긴축, 외국인 주식소유한도 연말까지 50% 확대 등의 우선조치 사항을 담은 각서

IMF 자금지원 협의 관련 부총리 발표문

IMF 자금지원 협의 관련 부총리 발표문


'IMF 플러스’—제2차협상(1997년12월19∼24일)

12월 5일 IMF의 대기성 차관 미화 56억 달러가 한국은행 계좌로 입금되었다(강만수 2005, 523쪽). 한국은 이에 응답하여 12월 10일 외국인 주식소유한도를 50퍼센트로 확대하고 12일에는 외국인에 채권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IMF의 초기 개입은 예상과는 달리 외국인 투자자의 신뢰를 회복시키지도 한국 경제를 안정시키지도 못했다. 금융시장의 혼란은 오히려 더욱 더 커졌다. IMF 지원금이 달러 부족으로 대출을 회수하지 못하던 해외 투자자들에 대출을 회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패닉에 빠져있던 투자자들은 대출기간을 늘려주고 이자를 받기보다는 당장 투자금을 돌려받으려 했다. 이에 따라 자본이탈이 계속되었고, 외채의 만기 연장률은 12월 18일 5.1퍼센트까지 내려갔다.

그 결과 외환보유액이 오히려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2월 13일 가용 외환보유고는 86억 달러였다. 연말까지 IMF 등에서 75억 달러가 들어올 예정이었으나 연말까지 140억 달러를 상환해야 했기 때문에 가용 외환이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 12월 18일에는 가용 외환보유액이 39억 4,000만 달러로 최저치를 기록했다. 19일에 IMF로부터 35억 달러가 입금되어 가용 외환보유액이 75억 달러로 증가했으나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추락하는 한국 원화는 외환시장을 마비시켰다. 12월 10일에는 외환시장 개장 37분 만에 거래가 중단되었으며 환율은 하루 상승 제한 폭(전일 대비 10%)인 1,565.90원까지 폭등했다. 11일에도 원화 환율은 1,719원으로 폭등하며 외환시장은 몇 분 만에 거래가 중단되었다. 이렇게 되자 정부는 원/달러 환율의 일일 변동폭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다(12월 16일).10월 28일과 11월 27일 500선이 붕괴되었던 코스피 주가지수는 12월 11일 360 까지 폭락했다(정덕구 2008).

한편 IMF 프로그램이 지시한 고금리정책과 금융구조조정은 시중은행과 기업들을 마비시켰다. 금융비용이 폭증한데다 영업이 정지된 9개 종금사로부터 채권을 회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2월에 기업 도산은 2배 이상 증가했다. 12월 5일에는 고려증권이, 6일에는 한라그룹이 부도 처리되었고 10일에는 5개 종금사가 추가로 영업정지를 당했으며, 12일에는 동서증권이 법정관리 신청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디스와 S&P는 각각 10일과 11일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정크본드’직전 수준까지 하향 조정했다. 더구나 10일에는 김대중 대선 후보가 당선 시에 IMF와 재협상하겠다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자본이탈은 더욱더 악화되었으며 12월 13일, 뉴욕에서 정부보증 채권을 발행해 외국환평형기금을 만들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제 1998년 1월까지 추가적으로 미화 120∼150억 달러의 부채가 만기되는 상황에서 추가 조치 없이는 국내 금융기관들이 대외 채무불이행에 들어갈 것이 분명해졌다. 그 경우 적어도 단기간은 여러 중요 재화 및 (수출용) 원자재의 부족으로 한국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IMF의 초기 자금지원은 당장 갚아야할 돈에 비해 너무나 부족해 실효성이 떨어졌고, IMF프로그램에 포함된 대대적인 구조개혁안은 오히려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한국 경제구조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암시를 주면서 금융시장 패닉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투자자들은 불안한 투자처인 한국에서 자본을 회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과 IMF는 IMF의 개입 이후의 이러한 상황 악화를 순전히 한국 탓으로 돌렸다. 한국 정부가 구제금융 이후 열흘간 개혁에 미적거리고 김대중 후보가‘IMF 재협상’발언을 하는 등 IMF 프로그램을 실행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아 시장의 신뢰를 깨뜨렸다는 것이다.

IMF 이사회(12.18) 논의결과

IMF 이사회(12.18) 논의결과

루빈 미 재무장관은 한국이 IMF 구제금융 조건을 먼저 이행하기 전에 어떠한 추가적인 자금 지원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백악관 회의에서 한국에 확신 없이 계속 돈을 줄 수 없음을 표명했다. 강력한 개혁이 없다면 한국에 대한 자금 지원은 어차피 실패할 것이기에 한국을 부도내도 좋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루빈은 최초의 570억 달러 구제금융 중에서 미국이 2선에서 지원해주기로 한 50억 달러를 즉시 송금해달라는 임창렬 부총리의 요청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기까지 했다(Blustein and Chandler,《워싱턴포스트The Washington Post》, 1997년 12월 28일). 이러한 루빈의 강경한 태도를 두고 당시 월스트리트에서는 그가 개인적으로 한국 재경원에 앙심을 품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한다(김인영 2004, 248쪽). 하지만 루빈은 이러한 강경한 태도 뒤에 한국이 경제개혁을 신속히 이행한다면 자금 지원을 가속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 또한 열어두고 있었다.

IMF 구제금융에도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국가부도’ 직전까지 몰리게 되자, 한국 측은 특단의 대책을 모색했다. 12월 12일 임창렬 총리는 김기환 경제협력 특별대사, 김만제 전 부총리 및 포항제철 회장, 정인용 전 부총리 등과 조찬모임에서 국제금융계와 접촉하여 자금 회수 중지를 요청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김만제와 정인용은 월스트리트가 있는 뉴욕으로, 김기환은 미 재무부가 있는 워싱턴으로 향했다. 김기환은 애초부터 워싱턴행을 작정하고 있었다. IMF와 국제금융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워싱턴을 움직이는 것밖엔 국가부도를 면할 다른 방도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11월 말 밴쿠버 APEC 정상회담에서 받았던 핫라인 전화번호를 통해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과 워싱턴 DC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김영삼 정부의 이름으로 협상할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며칠 전부터 워싱턴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 받기 위해 이회창, 김대중 두 대선 후보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상태로 12월 18일 아침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고 출국한다.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김기환은 미 재무부에 제시할 개혁안을 ‘IMF 플러스’ 라고 이름 지었다. 미 재무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12월 3일 합의된 IMF 프로그램보다 신속하고도 추가적인 한국 경제 시스템 개혁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이회창이 아닌 김대중이 당선될 경우에도 강력한 구조조정과 노동 유연화를 포함한 개혁안을 받아들일까 하는 점이었다. 워싱턴에 도착한 김기환은 김대중의 당선 소식을 접하고 12월 19일 오전 국민회의 조순승 의원한테 전화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답 전화를 기다렸으나 마침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화가 왔다. 음성사서함에는“대통령 당선자가 귀하의 협상을 전적으로 지지한다”는 유재건 국민회의 총재 비서실장의 메시지가 녹음되어 있었다. 구체적인 협상 방향에 관한 지시나 문의는 없었다. 김기환은 이 간단한 메시지 하나로 새 정부를 대신해 미 재무부와 협상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는 협상 준비를 위해 이경식 한은 총재한테 전화해 정확한 외환보유고 통계를 요구했다. 이경식 총재가 김기환에게 보낸 한국은행 워싱턴 사무소 이근영 소장의 기밀서류에 추정된 1997년 말의 외환보유액은 -6억에서+8억 달러 사이였다.

같은 날 오전 11시 45분 김기환은 서머스 부장관과 가이트너 차관보를 포함한 미 재무부 관료 8∼9명을 만났다. 그는 신속한 IMF 자금 지원과 외국은행의 자본 회수 중단(채무 만기연장)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외국인 주식 및 채권투자 한도의 추가 확대, 무역부문 조기 개방,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리해고제 도입을 포함한 ‘IMF 플러스’ 개혁안을 제시했다. 서머스는 조속한 IMF 자금 지원에는 호응했으나 자본 회수 중단 요청에는 난색을 드러냈다. 미국의 제도상 은행에 직접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일본 정부에 부탁해줄 수는 있다고 했다.

회의가 끝난 후 가이트너 차관보는 한국의 부도가 두려운 듯 김기환을 따라와“김 대사, 오늘 ‘채무불이행’이란 말을 쓰던데 그 용어만큼은 쓰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사실 한국의 채무불이행이 세계경제에 일으킬 충격은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IMF도 은행들이 만기연장을 해주지 않으면 한국은 부도가 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었다. 서울에서는 40∼50인의 외국계 은행 대표들이 회동해 한국의 단기채무를 만기연장해야 된다고 의견을 모았고, 미국과 유럽의 은행들도 한국을 구제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이 부도날 경우 그들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해야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편 미 국무부, 국방부, 국가안보회의National Security Council(NSC)에서는 한국이 부도가 날 경우 장기간의 정치적·사회적 소요와 더불어 북한과의 유혈 갈등도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과 코언William Cohen 국방장관 등은 백악관 상황실의 회의에서 상황의 심각성에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으로서는 어떻게든 지원을 안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때 김기환의‘IMF 플러스’제안은 강경했던 미국 재무부가 챙길 건 챙기면서도 모양새 좋게 지원에 나설 수 있도록 해준 셈이었다.

그날 저녁 백악관의 국가안보회의에서 클린턴 대통령은 한국에 2선 자금을 조기 지원하고, 월스트리트를 설득하여 한국의 외채를 만기연장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IMF 플러스’의 구체적인 내용과 대통령의 개혁 의지를 확인하기 위해 립턴 차관을 다음 날인 20일 1시 비행기로 다시 서울에 파견하기로 했다. 가이트너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통보받은 김기환은 다음 날 오전 서둘러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IMF 플러스’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선거운동 기간에 임금과 정리해고를 6개월간 동결할 것이라고 공약하기도 했었다(《한겨레》, 1997년 12월 6일). 따라서 김대중은 립턴에게 자신과는 다른 소리를 할 가능성이 컸고 그 경우 미국의 지지는 철회될지도 몰랐다. 때문에 김기환은 립턴보다 먼저 도착하여 김대중 당선자가 립턴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른 공약을 들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사실상 개인의 독단에 따라 이루어진 협상 결과를 받아들이라는 형국이었다. 한국 시간으로 12월 21일 저녁에 도착한 김기환은 먼저 임창렬 부총리를 찾아가 협상 결과를 보고했다. 임창렬도 추가 개혁 수용이 불가피하다는 데 동의하고 김기환에게 다음 날 오전 7시에 김대중과의 면담 약속을 잡아주었다. 다음 날인 22일 아침 김기환은 일산 자택의 김대중 당선자를 방문했다. 때마침 립턴 차관의 방한이 TV로 보도되고 있었다. 김기환은 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김대중과의 만남에서 -6억에서 +8억 달러에 불과한 연말 외환보유액 추정치를 들며 부도위기에 처한 한국의 상황을 설명하고, “곧 미국 대사관에서 립턴과 면담해줄 것을 요청할 것이다. IMF 플러스를 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과의 만남 이후 김대중은 전직 미국 러트거스대학 경제학과 교수이자 자신의 경제고문인 유종근 전북도지사에게 의견을 물었다. 당시 유종근은 친노동적인 김대중이 노동조합을 더 잘 설득할 수 있으니 시장개혁을 더 잘할 수 있다면서 이러저러한 통로로 IMF와 미 재무부를 설득하려하고 있었다. 립턴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날 밤에도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고 김대중을 설득했었던 유종근은 당연히 ‘IMF 플러스’에 찬성했다.

결국 김대중은 마음을 바꾸었다. 바닥난 외환보유고로 외국의 지원 없이는 국가부도가 임박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머리에 총구가 겨누어진”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오전 11시 30분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여의도 국민회의 당사에서 유종근 경제고문과 스티븐 보즈워스Stephen Bosworth 주한 미 대사가 참석한 자리에서 립턴 미 재무부 차관을 만났다.

미 재무부가 김대중에 대해 알고자 한 것은 이 민주화 투사에게, 부실한 은행과 재벌을 폐쇄할 때 불가피한 해고와 노동력 재배치를 수용할 만큼 개혁의지가 있느냐였다. 립턴은 정리해고에 동의하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대신“임금수준이나 고용 중 하나의 희생은 불가피하다”면서 (정리해고를 하지 않으려면) “임금수준의 유연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꺼냈다. 이에 김대중은 기대 이상의 답변으로 미 재무부를 만족시켰다. 그는 국제경쟁력 강화만이 경제 난국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라면서“기업이 망해 해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는 해고가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리고“IMF가 권고하는 협약을 IMF 플랜이라기보다 ‘한국 플랜’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문화일보》, 1997년 12월 23일). 당선 후 불과 며칠 만에 임금과 정리해고를 동결하겠다던 공약이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좌파적이고 친노동적이며 포퓰리스트라고 알려져 있었던 김대중은 이 면접으로 해외의 모든 의혹을 해소하고 미 재무부와 월스트리트에 자신의 강력한 시장개방 및 개혁 의지를 확인시킬 수 있었다.

마침내 12월 24일 자정, 한국과 IMF와의 추가 합의 내용과 함께 IMF와 선진국의 한국에 대한 조기 자금 지원이 발표되었다. IMF와 13개 선진국은 12월 말까지 100억 달러의 자금을 조기 지원하고,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한국의 외채를 만기연장해주기로 했다. 한국의 부도를 넘길 수 있게 해준 ‘성탄절 선물’이라 일컬어진 이 합의는 콜금리 추가 인상 및 이자 제한 폐지, 외국인 주식소유한도 폐지, 채권시장 완전 개방 및 금융상품 투자 자유화, 조기 무역 자유화 등 조기 시장개방 조치와 더불어 금융서비스 자유화, 사실상의 정리해고제 도입 및 파견근로자제 입법 등을 담고 있었다.

imf 제출 정부 2차 의향서 내용 (전문요약)

imf 제출 정부 2차 의향서 내용 (전문요약)

imf 제출 정부 3차 의향서 내용 (부속서)

imf 제출 정부 2차 의향서 내용 (부속서)

보도자료 : IMF 및 주요선진국자금 조기지원 주요내용

임창렬 부총리 조기지원 관련 대국민 발표


채무 만기조정—제3차 협상(1998년 1월 21∼28일)

‘IMF 플러스’는 채무 만기연장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한국 정부의 전략 중 하나는 “단기차입의 만기연장 개선과 중기적 차입 가능성에 대해 외국은행들과”논의하는 것이었다(IMF 제2차 의향서 1997년 12월 24일). 12월 24일 이후에도 실제로 집행된 IMF 지원자금은 약 40억 달러(1997년 12월 30일 및 1998년 1월 7일)뿐이었으며 미 의회는‘도덕적 해이’에 빠진 국가를 지원할 수 없다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금융지원을 반대했다. G7 자금도 실제로는 집행된 적이 없다. 반면 한국의 총 대외부채는 당시 미화 약 1,530억 달러로 알려져 있었고, 그중 802억 달러(54.2%)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부채였다(《매일경제》, 1997년 12월 31일). 단기채무의 상환 기일을 전면적으로 재조정하지 않는다면 모라토리엄이 불가피했다.

IMF 총재 면담시 주요 말씀요지

IMF 총재 면담시 주요 말씀요지

이런 상황에서 한국으로부터 외국자본의 도피가 ‘일시적으로’멈춘 것은 미 재무부, 연방준비은행, IMF, 채권은행의 공동 노력 덕택이었다. 특히 자국 은행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고 자국 은행에 “무엇을 하라고 지시할 수 없다”던 미국이 입장을 바꾸어 이러한 전 지구적 ‘관치금융’에 앞장섰다. 연방준비은행의 2인자인 윌리엄 맥도너William McDonough 뉴욕연방준비은행 총재는 12월 22일 오후 성탄절 휴가를 즐기고 있어야 할 월스트리트의 은행가들을 소집하여 한국의 채무불이행을 막는 것이 은행들의 집단적 이해관계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설득했다. 미국 6대 은행(씨티은행, JP모건체이스앤드컴퍼니, 체이스맨해튼, 뱅크오브아메리카, 뱅커스트러스트, 뱅크오브뉴욕)의 최고위 간부가 모인 이 자리에서 맥도너는 한국을 구제하는 데 납세자들의 돈을 쓸 수 없다면서 은행들이 채무 만기연장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특히 그는 이를 거부하면 IMF와 미 정부는 한국의 채무불이행을 더 이상 막지 않을 것이고 은행들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결국 12월 24일 2차 회의에서 월스트리트는 만기연장에 동의했고, 이에 따라 같은 날 한국에서 조기 자금 지원과 채무 만기연장이 발표될 수 있었다.

한편 서머스 미 재무부 부장관은 G7 국가의 재무부에 만기연장 협조를 부탁했다(Blustein and Chandler,《워싱턴포스트》, 1997년12월28일). 이에 따라 IMF는 시시각각 만기가 도래하는 채권들을 전 지구적 수준에서 날마다 연장해주는 역할을 했다. 매일 아침 한국 정부 관리들이 IMF에 전화를 걸어 그날 만기되는 채무 내역을 보고했고, IMF는 이 정보를 G7 국가의 재무부나 중앙은행에 넘겨 각국의 채권은행들이 한국의 채무를 만기연장해주도록 관리했던 것이다. 미국과 독일 등의 채권은행들도 곧 만기되는 채권의 상환(미화 150억 달러) 기한을 1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자발적으로 결정했다(1997년 12월 29일). 미국과 유럽의 금융 당국은 만기가 임박한 여신을 연장해주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었으므로 이는 매우 예외적인 조치였다. 그 결과 만기 연장률은 1997년 12월 18일 5.1퍼센트에서 1998년 1월 15일 77.4퍼센트로 크게 늘어났다.

IMF 일일동향 보고(12.27/28)

IMF 일일동향 보고(12.27/28)

그러나 이러한 만기연장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기에 모라토리엄의 위험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따라서 보다 영구적인 조치로 대체될 필요가 있었다. 1998년 1월 21일 뉴욕에서 시작된 한국 정부와 13개국 채권단 사이의 채무 만기조정 협상은 이 같은 구조적 조건에서 진행되었다. 처음 협상을 주도한 것은 미국계 은행들이었다. 1997년 12월 29일 씨티은행과 체이스맨해튼이 뉴욕에서 채권은행단을 조직했다. 채권단 결성은 한국 정부와 외국은행들의 협상을 훨씬 더 용이하게 했다. 즉 한국 정부는 은행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할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들 사이의 견해 차이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 협상을 주도한 JP모건은 한국 정부가 미화 250억 달러어치의 국채를 발행하고 외국인 투자자가 한국의 민간부문에 가지고 있는 150억 달러어치 단기채권을 국채로 교환해주는 부채 조정안을 제시했다. 이 안을 수용할 경우 신용등급이 바닥인 한국 정부는 매우 높은 금리를 물어야 했지만 JP모건 등은 고금리 및 국제시장에서의 채권거래로 큰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다행히도 미국계 은행과 달리 일본 및 유럽계 은행은 JP모건 안에 반대했고, 한국 정부 안에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이들은 한국의 외채 중 40퍼센트가 일본, 45퍼센트가 유럽, 나머지 15퍼센트가 미국에서 빌려온 것인데도 미국계 은행이 협상을 주도하는 데 불만을 품었다. 또한 그들은 부실채권을 국채로 전환하는 JP모건 안이 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나중에 경제가 회복되었을 때 거래를 회복하기 어렵게 할까봐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에 국채 전환 대신에 채권에 대한 정부지급보증을 제안했다. 이렇게 일본과 유럽의 은행이 한국 정부의 채무지급 보증을 조건으로 단기채무를 연장하는 데 만족했기 때문에 JP모건 안은 초기에 폐기되었다.

외부의 상황도 협상에 영향을 끼쳤다. 1월 27일 인도네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자 한국 측은 전술적으로 채권자들이 불합리한 요구를 계속하면 한국도 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수 있다는 암시를 흘렸다. 루빈 장관도 협상 전부터 채권은행에 만기연장 조건을 완화해줄 것을 촉구하였으며 협상 중에도 매일 이에 대해 미국 은행장들과 전화 회의를 했다. 모라토리엄에 대한 우려와 미 재무부의 압력 때문에 채권자들은 원래 제안한 것보다는 낮은 수준의 가산금리를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1998년 1월 28일 미화 약 240억 달러에 이르는 단기채무의 조정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원래의 채권은 정부가 보증하는 1년, 2년, 3년 만기채권으로 교환되기로 했다. LIBOR(당시 6개월 만기채권에 5.66%)에 각각 2.25, 2.50, 2.75퍼센트의 가산금리가 더해졌지만, 만기 이전에도 조기상환이 가능한 조건이었다. 이렇게 한국 정부는 IMF와 미 재무부가 원래 근본적으로 반反시장적이라고 간주했던 조치인 채무보증을 통해 위기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SM 98.34 Negotiations with Commercial Banks

SM 98.34 Negotiations with Commercial Banks

외환위기의 발생 및 구제금융 협상과정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 2011) 5장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 (1) IMF 협상과 지구적 위기관리의 정치경제학’의 분석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링크를 통해 저서의 전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