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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주형 선생님의 저서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바탕으로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까지 한국의 상황과 IMF와의 협상 과정, 구제금융이 한국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살펴봅니다. 

1998년 1월 클린턴 미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 참모였던 딕 모리스Dick Morris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지금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과연 한국인들에게 옳은지 어떤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 그들(한국)에게 실업자를 양산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물론, 외국인들이 한국 기업을 사들이도록 하고 있다. 지금 우리(미국)가 그들(한국)에게 강요하는 것은 사실, 미국에서조차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자본주의적 관행이 아닌가?(《월간조선》, 2000년 6월 〈독점인터뷰 : 클린턴의分身딕모리스〉)

이처럼 IMF 프로그램이 요구한 고금리를 포함한 거시경제정책과 시장개방은 미국으로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외국 투자자들에게는 최상의 바겐세일을, 한국인들에게는 대량 도산과 실업을 의미했다. 그럼에도 미 재무부는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고통에 무관심했다.

1, 2차 협상을 통해 ‘월스트리트-미 재무부-IMF 복합체’는 “표준적인 IMF 프로그램 이상으로 한국에 “구조적·제도적 개혁을 요구”했지만, 반면에 국제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투자 결정에 대한 값을 전혀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 IMF가 지원한 자금은 한국 정부와 채무자를 경유해 곧바로 국제 채권자에게 흘러들어갔을 뿐 아니라, 성공적인 채무 만기조정은 채무불이행에 대한 외국인 채권자들의 우려를 종식시켰다. 채무 탕감은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외국 투자자들은 금전적 손실을 보는 대신 원금을 보전했을 뿐 아니라 연 2퍼센트 이상의 높은 가산금리까지 챙길 수 있었다. 더구나 IMF와 세계은행도 민간채권은행들 못지않은 수익을 올렸다. IMF는 전례 없이 통상적인 이자에 3퍼센트의 마진을 더 붙였으며 이는 매년 0.5퍼센트씩 증가하여 최고 5퍼센트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세계은행도 통상 대출금리인 리보+0.25퍼센트보다 가산금리가 4배나 높은 리보+1퍼센트의 금리를 부과했으며 수수료 명목으로 융자금의 2퍼센트를 미리 떼기까지 했다.

이에 더해 IMF프로그램에 따라 한국 경제가 전면적으로 자유화되고 개방되면서, 외국 투자자들은 헐값에 기업과 주식을 인수하여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은 실상 “한국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 은행을 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했다. 사실 초국적 금융자본은 아시아 금융위기로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97년에 “월스트리트는 역사상 최고의 해를 만끽하고 있었다”(Kirk 2000, 9쪽 ;Strange 2000, 14쪽 참조).

[참고] IMF 합의안별 주요내용 비교(잠정)

[참고] IMF 합의안별 주요내용 비교(잠정)

한국의 채무자들뿐만 아니라 13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수많은 채권자와 투자자들도 감수 해야 마땅했던 ‘지구적’ 금융위기는 이렇게 한국으로만 그 무대가 좁혀졌다. 한국 경제는 비록 채무불이행과 모라토리엄을 피할 수 있었지만, IMF 프로그램의 혹독한 결과와 마주해야 했다. 이즈음 CIA는 이후의 상황 전개를 다음과 같이 예측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한국과 IMF의 합의로 외국인 개인투자자의 소유지분한도가 7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확대될 것임. 9월 이후 원화의 35퍼센트 평가절하로 달러를 평가했을 때 철강이나 자동차 공장과 같은 생산적 자산이 외국인에게 매우 저렴해짐. 〔이러한 자산을〕외국인이 상당부분 인수할 경우 공적인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한국 재벌들이 외국인들에게 실물자산을 매각하여 튼튼한 사업부문만 남길 경우〔한국〕언론은 IMF 구제금융이 ‘트로이의 목마’라는 종전의 주장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큼(CIA Director of Intelligence,“Economic Intelligence Weekly”, 1997년 12월 20일).

극도의 유동성 부족을 특징으로 하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한국 정부는 외환보유고를 늘리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한국 정부는‘IMF 플러스’를 포함한 IMF 프로그램을 되도록 빨리 실행해야 했다. 사실상 ‘거수기’로 전락해버린 국회는 예전에 통과시키지 못했던 금융개혁(중앙은행 독립 및 금융감독기관 통합), 금융 자유화 및 노동시장 유연화에 관한 법률을 서둘러 처리했다(1997년 12월 29일 및 1998년 2월 14일). 하지만 IMF 프로그램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은 한국을 총체적인 경제 불황으로 몰아넣었다.

1997년이후 주요 금융관계법의 제정 및 개정내용

1997년 이후 주요 금융관계법의 제정 및 개정내용

[보고서] 98년 민주노총 5대요구안 해설서

[보고서] 98년 민주노총 5대요구안 해설서]

먼저 IMF의 고금리 정책은 이미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기업부문의 도산을 촉진시켰다. 1997년 12월 부도율은 평소보다 8배나 치솟았다(《매일경제》,1998년 1월 7일). 또한 재정·통화 긴축은 경제위기로 이미 위축된 내수를 더욱더 위축시킴으로써 불황을 심화시켰다. 전경련은 캉드쉬 IMF 총재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 기업에 가혹한 고금리를 부과하는 현재의 거시경제정책은 즉시 재고되어야 한다고 호소했다(좌승희 1999, 272쪽). 그러나 캉드쉬의 답장은 부정적이었다. IMF는 원화 가치가 안정될 때에만 이자율을 낮추겠다는 것이었다(좌승희 1999, 277쪽 ; 《경향신문》, 1998년 1월 14일).

IMF  고금리 정책의 문제점

IMF 고금리 정책의 문제점

또한 금융기관의 폐쇄를 중심으로 한 IMF의 금융구조조정 정책은 신용경색, 기업 도산 그리고 뱅크런을 심화시켰다(Stiglitz 2002, 114∼116쪽 ;Chossudovsky 1998b). IMF는 금융기관이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적정 자기자본 비율 8퍼센트를 충족하지 못할 경우 영업을 정지시키거나 폐쇄하도록 지시했다. 고금리 및 통화 긴축정책과 더불어 이 기준의 도입은 금융시장에 심각한 신용경색을 초래했다. 금융기관들이 BIS 기준에 맞추기 위해 만기연장을 거부하고 대출을 회수하거나 여신을 축소했기 때문이다(Shin and Chang 2003, 99쪽 ; Park 2003, 197∼201쪽). 강봉균 당시 청와대 정책기획 수석비서관에 따르면, “돌이켜보면 고금리보다 신용경색이 더 문제였다. 은행들을 아무리 다그쳐도 기업에 돈이 나가지 않는 신용경색이 얼마나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30여 년 동안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으니……우리〔정부〕도 IMF도 경제가 그만큼 가라앉을 줄은 정말 몰랐다” 특히 정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1998년 1/4분기를 제외하면 시중은행은 중소기업에 대한 여신을 대폭 축소했다. 중소기업 여신은 1996년 9.73조 원, 1997년 3.17조 원에서 1998년 상반기 5,520억 원으로 급감했다. 대조적으로 1998년 1/4분기에 은행들은 이미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재벌 등 대기업에 약 5.97조 원의 여신을 제공했다. 이는 1997년 같은 범주의 기업들에 제공된 여신의 합계를 초과하는 것이다(재정경제부 1998, 339쪽). 은행들은 재벌의 침몰을 막아야 재벌에 제공했던 막대한 여신이 부실화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Bridges 2001, 70쪽).

고금리와 신용경색의 결과 기업 도산과 실업이 급증했다. 1997년 12월부터 1998년 4월까지 월평균 3,000건 이상의 도산이 발생했다. 이는 1996년 966개, 1997년 1,431개의 월평균 도산 건수에 비해 2배 이상 늘어난 수치였다(삼성경제연구소 1998, 123∼124쪽). 마찬가지로 은행의 국제무역에 대한 금융지원도 약화되었고, 높아진 금융비용 때문에 수출사업의 수익성도 크게 악화되었다. 더구나 극심한 경제침체로 제조업 부문의 평균 설비 가동률은 67.3퍼센트(특히 자동차산업의 경우에는 39.6퍼센트)로 하락했으며, 설비투자도 1998년도 1/4분기에 급격히 줄어들어 1997년도 같은 기간 대비 40.7퍼센트나 하락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융기관의 극도로 조심스런 태도와 신용경색으로 기업 도산이 증가하자 역으로 금융부문의 부실채권은 더욱더 증가했다(1997년 말 68조 원에서 1998년 118조 원으로 급증). IMF의 정책으로 금융위기가 기업위기가 되고 기업위기가 다시 금융위기가 되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실업률 또한 1997년 10월 2.1퍼센트에서 1998년 2월 말 6.1퍼센트로 급증했고 1998년 7월 말에는 30년간 최고인 7.7퍼센트(167.5만 명)를 기록했다. 그러나 해고된 노동자 중 4분의 1만이 정부로부터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Bridges 2001, 82쪽). 임금도 하락했다. 예컨대 제조업 부문의 임금은 1998년 1/4, 2/4, 3/4 분기에 전분기 대비 각각 2.6, 3.9, 10.1퍼센트가 감소했다.

이렇게 외환위기를 둘러싼 일련의 협상 과정은 위기의 효과 및 위기관리 비용을 불균등하게 배분하는 정치적 과정이었다. 협상의 결과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한 초국적 금융자본은 금전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한 반면에, 한국의 자본과 노동 그리고 국민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엄청난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KBS1, 시사기획 쌈-최초 공개 외환위기 美 비밀문서-IMF와 ‘트로이 목마’

한국 사회가 맞은 외환위기의 충격은 단순히 ‘어려웠던 시기’나 ‘불황’을 겪었다는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국 사회 안에서도 모든 위기의 후과는 다시 불균등하게 배분되었지만, 위기 대응과정에서 한국이 겪은 극심한 불황은 ‘경제 개혁’으로 인한 사회 전체의 변화를 빠르게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만들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외환위기는 한국의 자본주의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 결정적 순간이었다.

외환위기의 발생 및 구제금융 협상과정은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지주형, 2011) 5장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 (1) IMF 협상과 지구적 위기관리의 정치경제학’의 분석내용을 발췌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링크를 통해 저서의 전체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