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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화와 고성장을 이루었던 개발국가 모델은 7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대책부터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한 경제정책과 변화의 흐름을 오형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함께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이 한창인 2019년,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를 예전 ‘플라자 합의’에 빗댄 보도가 종종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래와 같은 보도는 그 많은 예 중 하나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조만간 고위급 무역협상을 다시 시작합니다. 양국이 조금도 양보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는 가운데, 미국의 궁극적 목표는 중국에 대한 '제2의 플라자 합의', 이른바 ‘런민비합의’라는 설이 월스트리트에 나돌고 있습니다. [한국경제 2019.07.04 <김현석의 월스트리트나우> “중국 무너뜨릴 처방전은 ‘제2 플라자 합의’”]

‘제2의 플라자 합의’는 이뤄질 수 있을까?
G5 국가들을 밀어내고 새롭게 부상하는 위안화

그렇다면 플라자 합의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서 이것이 한국에 영향은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우선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플라자 합의’를 찾아보죠. 핵심만 요약하면, 플라자 합의란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위한 주요 국가들 간의 정책 합의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1985년 미국, 프랑스, 독일, 일본, 영국(G5) 재무장관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외환시장에 개입해 미달러를 일본 엔과 독일 마르크에 대해 절하시키기로 합의한 것을 말한다. 1980년 중반까지 미 달러화는 미국의 대규모 적자에도 불구하고 고금리 정책과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 때문에 강세를 지속하고 있었다. 미국은 국제경쟁력이 약화됨에 따라 자국 화폐가치의 하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있었고 다른 선진국들은 미 달러화에 대한 자국 화폐가치의 하락을 막기 위해 과도한 긴축통화정책을 실시해야 했으며 그 결과 경제가 침체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에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및 일본은 1985년 9월 뉴욕의 플라자 호텔에서 미 달러화 가치 하락을 유도하기 위하여 공동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기로 합의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2년간 엔화와 마르크화는 달러화에 대해 각각 65.7%와 57% 절상됐다. 그러나 그후 미 달러화의 가치하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개선되지 못했고 독일과 일본 등이 국제 경쟁력 상실을 우려하여 자국 화폐의 절상에 주저함으로써 플라자 합의는 더 이상 이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엔화 가치의 상승(엔고)은 일본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플라자 합의(Plaza Accord)’ (한경 경제용어사전)]

이 합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기위해서는, 우선 당시 왜 미국이 자국 통화의 가치를 하락시키려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플라자 합의가 있기까지 달러화의 위상의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파악해야겠죠.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를 비교했을 때, 달러화의 가치는 매우 큰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1971년 닉슨 미 대통령의 금태환 중지 선언이후 매우 낮은 수준을 유지했던 달러화의 가치는 소위 ‘볼커 혁명’이라 불리는 폴 볼커 미 연준 의장의 급격한 금리인상(1979~1980년) 이후 정반대로 매우 높아졌습니다. 즉, 플라자 합의는 금리인상으로 1980년대 전반기 내내 유지된 ‘달러 강세 기조’를 다시 반전시키려는 시도였습니다.

달러 약세를 강세로 반전시키려는 시도는 채 몇 년 가지 못했던 것인데요. 그 이유는 미국의 무역적자 증대였습니다.

고금리 정책은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이는 1980년대 초에 전후 최악의 불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물가상승을 억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해도 마이너스 경제성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고금리 정책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1981년 1월 최고 20.06%까지 치솟았던 연방기금금리는 1982년 10월부터 10% 아래로 하락했다. 또 고달러 정책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1979~1980년대에 GDP의 0.91%였던 무역적자가 1983~1984년에 2.8%대로 폭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5년 9월, G5(미국, 영국, 일본, 서독, 프랑스)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여 달러의 평가절하에 대해 합의했다. 이것이 플라자협정(Plaza Accord)이다. 결국 1983~1985년을 거치면서 고금리 고달러로 상징되는 볼커의 정책은 철회되고 말았다. [윤종희. 2015. 『현대의 경계에서: 역사과학에서 조명한 현대 세계사 강의』, 생각의힘. 451쪽]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달러 강세’는 달러와 교환되는 타국 통화가 증대함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엔/달러 환율이 100엔/달러였다가 200엔/달러가 되는 것은 ‘달러 강세’ 또는 ‘달러 가치의 상승’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국가의 화폐 가치 상승은 무역수지를 악화시키게 됩니다. 앞의 예처럼 엔/달러 환율이 100엔/달러에서 200엔/달러가 된 상황을 예로 들어보죠. 미국 기업이 만든 100달러짜리 제품을 일본에서 판매한다고 할 때, 100엔/달러의 상황에서 이 제품은 10,000엔으로 팔리겠지만 200엔/달러의 상황에서는 200,00엔으로 팔리게 됩니다.. 똑같은 제품의 값이 이렇게 오르면 당연히 더 적게 팔릴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원리에서 미국에 수출하는 일본 기업의 제품은 더 많이 팔리게 되는데요. 10,000엔짜리 제품을 판매할 때, 100엔/달러인 상황에서는 100달러에 판매되었지만 200엔/달러인 상황에서는 50달러에 판매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듯, 미국 달러 가치의 상승 즉 ‘달러 강세’는 미국 기업의 수출에 불리하고 타국 기업의 수출에 유리하기 때문에 당연히 미국의 무역수지 악화로 귀결됩니다.

플라자 합의 직후 기념사진을 찍는 G5
(사진 좌측부터 독일, 프랑스, 미국, 영국, 일본) 국가 재무장관들

미국 입장에서 무역적자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달러 강세’를 ‘달러 약세’로 반전시켜야 했는데요. 이것은 미국 단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기준 금리 인하 등의 조치를 취하더라도, 독일(당시 서독)이나 일본에서 비슷한 금리 인하 조치를 취한다면 달러 가치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1985년에 플라자호텔에서 취해진 조치는 ‘달러 가치 하락’을 위한 주요 국가들의 정책 협의였습니다. 미국이 달러 약세를 위한 정책을 취하고, 독일이나 일본 등 다른 국가들이 자국 화폐 가치 강세를 용인한다는 내용으로요.

플라자 합의는 주요 5개 국가 사이의 정책 합의였지만, 한국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국은 일본 엔화 강세로 인한 반사 이익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계 주요 시장에서 한국 제품은 일본 제품과 서로 경쟁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 엔화 강세로 인해서 일본 제품의 가격이 높아지다 보니, 한국 제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진 것이죠. 그 기간은 주로 1986~1988년이었는데, 그 사이에 한국 경제는 엔화 강세로 인해 수출 호황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1986-1988년의 기간을 보통 ‘3저 호황’이라고 부르는데, 세 가지 저(低) 중 하나가 이 같은 ‘한국 화폐 가치의 상대적 하락’입니다. 이것이 ‘저유가’ 및 ‘저금리’와 함께 한국 경제를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는 상황으로 이끌었던 것이죠.

끝으로, 플라자 합의 이후 엔/달러 환율의 향방을 간단하게 살펴보죠. 1985년 플라자 합의 직전에 엔/달러 환율은 240 근처였다가 이후 꾸준히 하락하여 1995년에는 무려 83~85까지 하락합니다(다만, 이 하락이 일방향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고, 1989년 근처에는 다소 상승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에 83~85엔/달러까지 엔화 가치가 상승하자, 이 같은 엔고는 일본 무역 수지의 너무 큰 악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이 추세는 반전될 필요가 있었어요. 그래서 1995년 4월에 엔화 평가절하를 유도하는 정책 합의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를 가리켜 플라자 합의에 반대(逆)된다는 의미로 소위 ‘역(逆)플라자 합의’라고 부르죠. 이 역플라자 합의에는 아래와 같이 미국과 일본 양국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린 배경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재무성과 일본의 재무부는 다음 해에 클린턴 대통령의 재선을 돕고, 일본이 일상적인 수출 드라이브를 통해 거품 이후의 은행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한 거래에 동의했다. 미국의 로버트 루빈과 일본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는 그들이 달러 대비 엔화를 평가절하할 것을 결정했는데, 이는 일본의 수출 경쟁력을 크게 높이고, 그 대가로 일본은 미국에 계속 자금을 공급하며, 따라서 미국 금리는 정치적으로 바람직한 낮은 수준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Chalmers Johnson. 2001. "Ch. 2 Economic Crisis in East Asia: The Clash of Capitalisms," in Ha-Joon Chang et al. eds., Financial Liberalization and the Asian Crisis, Palgrave. p. 15]

어쨌든, 엔화 평가절상으로 이어진 플라자 합의가 한국의 수출 호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엔화 평가절하를 유도한 역플라자 합의는 당연히 한국의 수출 악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겠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은 어느 한 가지에서만 찾을 수는 없습니다만, 1995년 역플라자 합의에 이은 엔화의 평가절하(1995년 4월 약 83엔/달러 수준에서 1997년 4월 약 125엔/달러 수준까지)가 한국 기업 수출에 미친 부정적 영향은 분명히 1997년 외환위기의 한 원인을 이룰 것입니다.

집필자 | 오형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연구 관심 주제는 1990년대 전후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결과이다. 학위 논문으로 <한국 발전국가 전환과 1997년 한보사태>(박사논문)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서 국가의 역할>(석사논문)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운대학교(산업대학), 한서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