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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화와 고성장을 이루었던 개발국가 모델은 7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대책부터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한 경제정책과 변화의 흐름을 오형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함께합니다.  

우리는 흔히 한국 자본주의시기를 ‘국가 또는 정부가 개별 기업에 구체적인 사안까지 일일이 명령하고 지시했던 옛날’과 ‘민간 경제 주체들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요즘’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요즘에도 정부의 규제나 간섭이 너무 심하다’ 또는 ‘최근에는 국가가 기본적인 역할조차 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가장 일반적인 수준에서 국가나 정부 개입의 정도가 1960-70년대에는 많았지만 그 후에 점차 줄어들었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이 같은 변화는 구체적인 법 제도의 변화를 수반했는데요,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계기 중 하나가 바로 1985년에 제정된 <공업발전법>입니다. 아래에서는 이 법안이 갖는 중요성은 무엇이고, 법안 전후의 결정적인 변화는 무엇이며, 이 법안의 효과에 대해서는 어떤 논의들이 있나 살펴보겠습니다.

1987년, 미국 수출을 위해 선적을 기다리고 있는 자동차들

우선 <공업발전법>이 갖는 의의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산업정책’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해야 할텐데요. 산업정책이란 쉽게 말해서 국가가 특정 산업이나 기업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의미할 것입니다. 다만, 더 엄밀히 보자면, 통화량, 환경 규제, 노동법, 교육제도와 같은 모든 국가 정책이 어느 정도는 개별 기업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고 그렇다면 산업정책의 정의를 더 한정해야 될 필요가 제기됩니다. 그래서 장하준 교수는 아래와 같이 산업정책을 정의합니다.

기존의 산업정책 정의들은 실제 활용하기에는 너무 과부하 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산업 정책을 경제 전체에 효율적이라고 국가가 인식하는 결과를 달성하기 위해 특정 산업들(그리고 산업의 요소인 기업들)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이 정의는 흔히 ‘선별적 산업 정책’이라고 불리는 것과 가깝다(예를 들면, 1981년 Lindbeck의 정의). [Ha-Joon Chang . 1994. The Political Economy of Industrial Policy, Macmillan. p. 60]

위 정의에서 강조 표시는 다음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함인데요. 우선 ‘특정 산업들’은 교육투자나 하부구조적 개발과 같이 산업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제외한다는 것을, ‘효율적’은 공정성과 같은 다른 목적이 아니라 효율성이 추구된다는 것을, ‘경제 전체’는 산업 정책이 궁극적으로 경제 전체의 효율성 증진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국가가 인식하는’은 이 정책이 반드시 모두에게 옳거나 정당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같은 책, pp. 60-61].

박정희 정권 시기에 형성된 한국의 산업 정책은 흔히 그 성격을 ‘강성(strong)’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는 대만의 ‘연성(soft)’과 대조적으로 사용됩니다. 쉽게 말해서 1960-70년대 한국 국가는 매우 개별 산업이나 기업에 직접적인 지시나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죠. 그 방식을 단순화하면 이렇습니다. 일단 한국 국가는 한정된 자원을 시장 원리가 아닌 국가 정책에 의해 배분합니다. 그래야 전략적으로 육성할 산업이나 기업에 더 많은 자원이 투입될 수가 있으니까요. 특히 금융 자원이 그랬는데요. 기본적으로 기업 투자 재원이 은행 대출에 기반 한다고 할 때, 국가가 승인한 대출에 대해서는 시장 금리보다 훨씬 저렴한 금리가 적용되었고, 사실 국가 승인이 없는 많은 대출 신청은 금리가 어떻든지 간에 대출 자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더 근본적으로는, 국가 승인이 없이는 애초에 사업 진출이나 투자를 할 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한 경영난에 빠진 기업을 도산시킬 것이냐 회생시킬 것이냐의 문제도 국가 차원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로 인해 규모가 큰 기업들이 더 많은 지원을 받게 되서 더욱 거대해지는 상황이 발생했죠. 그 결과물이 현재의 ‘재벌’일 것입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형성된 ‘한국형 산업정책’은 국가의 모든 자원과 시스템을 특정 업종 또는 기업에 집중하는(targeting) 중앙집중적, 불균형적 경성 산업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형 산업정책’에서 핵심적인 정책수단은 특정 산업의 선별적 육성을 추구하는 투자정책이었고, 금융정책, 무역정책, 조세정책 등은 이를 위한 보조적인 정책수단으로 동원되었다. 또한, 선별적인 산업정책이 초래하는 불균형을 조정하기 위한 산업구조조정정책(산업합리화정책 또는 불황정책)이 보완적 정책수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보완적인 정책수단은 결국 불균형적, 대외지향적 사회정책이 초래하는 부실을 사회하는 메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한국형 산업정책’의 ‘대상’은 ‘주요 업종의 주요 대기업’이었으며, 재벌체제는 정부 지원을 받는 주력 기업을 기반으로 하여 사업을 확장하고 타 사업 진출에 따른 위험을 내부화하는 메커니즘으로 확립되었다. 동시에 국가의 직접적 개입 방식에 기초한 산업정책은 상대적으로 소수의 재벌들을 산업정책의 대상으로 함으로써 거래비용을 줄이고 정보의 비대칭성 문제를 해결하면서 매우 효율적으로 추진될 수 있었다. 즉, 정책의 거래비용이라는 측면에서는 재벌체제는 국가개입형 강성 산업정책과 매우 궁합이 잘 맞는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일영 외, 2000. 「자유화와 산업정책의 변화: 동아시아 산업정책 비교 연구 서설」, 『동향과전망』 47. 37쪽]

이제 이상의 ‘강성 산업정책’이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살펴봅시다. 박정희 정권 시기 한국은 각 산업에 구체적으로 개입하기 위한 다양한 법안을 제정합니다. 그 목록을 살펴보면, 전자공업진흥법(1969년 제정), 조선공업진흥법(1967년 제정), 섬유화학공업육성법(1970년 제정), 철강공업육성법(1970년 제정), 기계공업진흥법(1967년 제정), 비철금속제련사업법(1971년 제정)입니다. 보통 이 법안들을 한데 묶어서 ‘개별공업육성법’이라고 부르죠. 이 개별공업육성법은 서로 매우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위에서 언급한 ‘강성 산업정책’의 주요 방식을 담고 있습니다. 개별공업육성법에 따르면, 정부는 일정 이상의 요건을 갖춘 기업에게 저금리 융자 등의 지원을 하면서 품질, 시설, 수급, 가격 등을 관리할 수 있었고,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집중적(targeting)이고 선별적(selecting)인 산업 관리를 수행했습니다.

1981년 공보처에서 찍은 울산 정유공장 야경.
정유공장은 ‘강성 산업정책’의 대표적인 수혜 산업이었으며, 경제발전의 상징적 이미지였다

그런데 <공업발전법>은 70년대에 형성되었던 위와 같은 개별공업육성법들을 대신해 만들어진 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공업발전법>을 제정한 의의는 1967~1971년에 제정된 개별공업육성법들을 폐지한다는 것에 큰 방점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폐지’의 명분은 경제 활동에 있어 더욱 ‘민간의 자율성을 증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공업발전법>은 3조(공업발전시책의 기본방향)에서 “①공업의 발전은 개인의 창의를 바탕으로 자율과 경쟁에 의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업발전법>의 의의에 대한 언론의 보도에서도 가장 강조되었던 부분입니다. 예를 들어, 1985년 9월 11일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는 “산업정책 민간주도로 전환”이었는데,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어요.

정부는 국내공업구조의 합리화를 촉진하기 위해 정부주도의 산업정책을 민간주도로 바꾸고 시장참입을 막는 현행법상의 각종 경쟁제한규정을 대폭 철폐하며 종래 업종중심의 정부지원방식을 기능 중심으로 전환, 유망 유치산업육성과 사양 산업 합리화 생산성 향상사업을 중점 지원하는 내용의 공업발전법안을 마련, 올 정기국회 의결을 거쳐 내년부터 시행키로 했다. <동아일보> 1985.09.11 1면.

그렇다면, 이 법안이 제정되기 전인 1985년까지는 개별 기업의 각종 경제 활동에 국가가 전면적으로 개입했고, 이 법안이 제정되고 시행된 1986년에는 그 전과 같은 국가 개입이 전혀 없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는 않겠죠. 그 이유는 다양할 것입니다. 우선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관성’이겠죠. <공업발전법> 시행 이후라도, 정부나 은행 또는 기업 담당자는 그 전의 관행을 답습한 사람일 테니까요. 게다가 <공업발전법>이 기업 활동에 수반되는 모든 ‘인허가’를 폐지한건 아닙니다. 결국 <공업발전법> 이후에 무엇이 얼마나 실제로 변화했냐는 꽤 정교하게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다만, 확실하게 언급할 수 있는 변화를 정리해보면 크게 다음의 두 가지일 것입니다: 첫째, <공업발전법> 제정으로 개별공업육성법이 폐지됨에 따라, 정부가 일부 주요 산업들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중요한 법적 근거가 소멸되었다. 둘째, <공업발전법>은 산업 정책의 기본 원칙을 ‘민간의 자율과 경쟁’으로 명시했다는 데에서 한국 경제 정책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집필자 | 오형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연구 관심 주제는 1990년대 전후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결과이다. 학위 논문으로 <한국 발전국가 전환과 1997년 한보사태>(박사논문)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서 국가의 역할>(석사논문)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운대학교(산업대학), 한서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