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97외환위기아카이브는 IMF를 겪었던 개개인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IMF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구체적인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구술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IMF 시민 구술기록_이수동(가명)

IMF시민 구술기록: 이수동(가명)

“그 당시만 해도 은행이 망한다? 이런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돈 걱정이 아니라 일 걱정을 하며 살았지.

55년생이에요. 서울에서 태어났고. 상고 중에 제일 쳐주는 상고를 나왔어요. 80%가 다 은행에 들어갈 때, 졸업하기 전에 은행에 들어갔고 그 당시에. 그러고 나서 야간 대학을 갔어요. 대학을 나와야 지점장이 되니까.

처음 들어갈 때는 국책은행. 거기 있다가 은행을 바꿨어요. 스카우트 되가지고 지역은행으로. 그러고 나서 00은행이라고 생겼어요. 신한은행 생길 때 원래 거기도 가려고 그랬는데 그때는 야간대학 다니느라 못갔고, 00은행으로 옮겨서 3년이상 일했고요. 저는 여의도랑 명동에서만 근무했거든요. 외환통이에요. 외환 주로 봤으니까.

은행의 후생이 얼마나 잘 되어있었냐면, 학교 졸업하기 전에 은행 들어갔으니까 군대를 갈 거 아니에요, 그것도 3년 가잖아. 3년동안 월급이 나와요. 일을 안 해도. 내가 전세를 들어간다 전세자금 대출해줘, 무이자로. 집을 산다? 옛날에 은행원은 집을 사고 싶어서 산 게 아니라 집을 사라고 해요. 당연히 무이자 얼마 저금리 얼마. 집은 당연히 사는 거고. 올림픽 공원 앞에 진주아파트. 거기서 우리가 계속 살았지.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세상이 어떤지) 신경을 안 썼어요. 술을 먹어도 다 양주 먹는 줄 알았고. 모르는 거지. 보수도 (은행권이) 제일 높았고. 거의 상여금이라는 게 백프로이상 나오는 거니까 봉급 빼고.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요. 은행 딱 나오니까 차비가 얼만지, 차를 어떻게 타는지를 모르겠는거야.

돈 걱정이 아니라 일 걱정을 하며 살았지. 굉장히 힘들었어요. 국제그룹 없어질 때 몇 달 동안 밤새고. 그땐 그런 게 힘들었지. 그땐 국제 기획단에 있어가지고. 하부조직의 은행원들은 할 일이 굉장히 많죠. 파견 나가고. 우리나라가 발전할 때는 무역 때문에 밤샘도 많았고. 나름대로 힘들었어요. 일하고 밤에가면 또 술 먹고, 사실 접대잖아 접대받고 또 접대하고, 골프치고 막 이랬으니까. 골프도 치고싶어 치나, 접대니까 하는 거지. 굉장히 목표지향적이었어요. 잘해서 혹시 뭐 IMF가 안됐으면 뭐 좀 했겠지. 근데 인생 자체가 잘못 살은 거지. 인생은 몰랐지.

그 당시만 해도 IMF 전만 해도 은행이 망한다? 이런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평생직장의 개념이었으니깐. 근데 잘 다니다가 IMF때 은행이 없어지더라고. 없어지는 기미가 있을 때, 그 때 이제 나와가지고.. 은행에서 직책은 지점장까지 했고요. 그때는 지점장이 권한이 좀 있었어요. 전결권이라고 해서 대출에 대한 권한, 여신에 대한 권한이 있어서 보통 100억 정도도 담보해서 해주고 이럴때고, 중소기업도 지원같은 건 신용만 되면 5천, 1억은 뭐 언제든지 전결을 할 수 있는 그런 게 있었는데. 뭐 그래서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 했지만은... IMF가 되고 나니까 얘기가 또 이상해지는 거야. 그래서 그때 나왔어요. 그때는 뭐 책임자급 이상은 다 나와야 되는 거니까. 그때부터 인생의 고난이 시작이 되는거죠.


집을 나왔어요. 그 당시에 상암동으로. 어디 갈 데가 없더라고. 창피도 하고.

저는 이제 세상에 갑자기 은행이 없어지니까, 이건 이야기 자체가 안되잖아요. 새로운 세상이니까. 모든 게 엉망이었고. 또 지점장을 3,4년 하다보니까 IMF 들어가지고 담보가치가 하락이 되고 막 이러니까 부실책임 추궁을 받더라고. 대출 잘해준다고 상 주더니 IMF 들어서 담보가치 떨어지니까 부실책임이라는 거야. 당연히 잘못됐지 IMF 때니까, 담보가 백이었다가 삼십억 떨어지고 그러니까 부실책임이 생기지.

그게 다 그런 건 아니고 공격적으로 은행근무를 했던 사람들, 점포장은 그거 당하는 거고 그저 그렇게 있던 사람은 그거 당할 일도 없는 거고 그래요. 지점장 했던 사람이나 높은 자리를 했던 사람들은 힘들지. 책임이 있고 은행이 없어지니까 그 쪽 상대편에서 인수한 채권 은행에서는 돈을 받으려고 그러고. 그럭저럭 사는 사람들은 그런 게 없지만 나처럼 잘났다고 떠든 사람들은 그렇게 돼요. 인생이 그런 거에요. 그러면서 국가는 나한테 해준 게 하나도 없지.

주택매입자금 받은 건 또 갚아야할 거 아냐. 근데 은행은 없어지고 돈은 없고... 그래서 집도 압류가 들어오고 다 처분해야하고 그렇게 된 거지 그러니까. 한 순간에 그렇게 된 거지.

그래서 집을 나왔어요. 그 당시에 상암동으로. 어디 갈 데가 없더라고. 창피도 하고. 상암동이 그때 월드컵경기장 한참 지으려고 막 부지를 확보할 때 그때 마침 거기를 들어갔어. 거기가 서울 시내에서 제일 싼 데예요. 그때 가격에 50에 20만원인가 주고 쓰레기 막 있고 그런데 거기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거기서 시작을 했어요. 그때부터 뭐 다 해봤어 공사장부터. 또 (옛날에) 술 먹으러 많이 다녔을 거 아냐. 아는 술집에 가서 대리운전도 하고. 그렇게 살았어요. 경기가 안 좋을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내가 97년, 98년도에 대리운전 하고 그랬는데 술 먹을 사람들은 다 먹어요. 외환위기 때는 있는 사람들이 망가진 게 아니잖아. 직장에 있던 사람들이 나온 거고. 또 은행 같은 것도 없어지면 나온 사람들 중 95, 96%는 제대로 나와서 받을 거 다 받은 거고. 근데 그중에서 공격적으로 경영을 했거나 대출을 많이 했거나 이렇게 괜히 잘난 척했던 사람들은 책임을 지는 거고. 모든 조직은 항상 느끼지만 중간이 좋은 거야.

그랬더니 또 기회가 오는가. 월드컵경기장을 빨리 만들어야 하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 전부 임대주택을 주대. 그래서 임대주택 하나 받아서 가양동으로 왔어요. 거기에서 어머니 모시고 있다가 부동산 공인중개사도 있고 하니까 부동산을 시작했어요, 2000년쯤. 그 이후로 잘 됐어요. 한참 클 때는 내가 서너 개 부동산을 놓고 그랬었어요. 근데 이놈의 은행에서 끝까지 부실책임 그게 그냥 오는 거야 계속. 아직까지도 와요. 아직까지도 내가 옛날에 30년 전에 찍은 대출이 잘못됐다고 뭐 어쩌고 저쩌고 이래. 왜냐면 소멸시효가 없어 이놈의 금융기관은. 끝까지 와요.

그리고 우리가 2009년 외환위기가 있었어요. 작은 위기. 프라임 모기지라고 해가지고 그때 또 위기가 왔어. 그때 부동산 말고도 기업에 컨설팅도 해주고 그랬었는데 그때 기업에 자금문제가 터져서 잠깐 힘들었죠. 근데 그래도 IMF때랑은 틀리지. 그때는 다시 또 일어날 기회가 있었어. 재기해서 다시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정확하게 2009년도 말에 내가 후배한테 한번 당했어요. 보니까 우리가 듣는 이야긴데 내 주변에 가장 친한 사람이 나를 이용한다 사기 친다 그러잖아. 그걸 건성으로 들었는 데 내가 당해보니가 그렇더라고. 그래서 그때 좀 크게 데미지를 입었죠.


2010년부터 딱 3개월만 살려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되었네.

그래서 그때 크게 당하는 바람에 집사람이 가만히 있겠어. 빚도 많이 있고. 빚이라는 게 국세예요. 그렇게 집사람이랑 헤어졌어요. 2010년부터 딱 3개월만 살려고 그랬는데 지금까지 고시원 생활을 하게 되었네. 내가 고시원 생활을 하는 걸 아는 사람 몇 명 없어요. 여기서 뭐 안해본 거 없어요. 당연히 이제 부동산을 할 입장은 아니죠. 몸도 나빠지고.

사실은 나 죽으러 갔어 산으로. 북한산 의성봉으로 오르며. 죽으러 갔는데 막상 못 떨어지겠더라고. 무서워. 그때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고 살고자하는 마음도 있고 못 뛰어내리겠더라고 차마. 북한산에는 험한 능선이 의성봉이라고 하는데 거기가 낭떠러지야. 한 시간을 있는데 기적적으로 거짓말같이 한 분이 오시더라고. 거기 왜 그러고 있냐 그래서 ‘살려주세요’ 해서 살았지. 그게 11월달이었어. 11월달이면 북한산 얼어요. 그 분이 밧줄을 해줘서 살아났어. 그분이 홀연히 가시데. 내가 보니까 산신령같아. 그때 이후로 절대 죽어선 안 되겠구나 하고, 그때부터는 북한산을 다니기 시작해서 국립공원북한산 시민보호단이고 자원봉사자고 자율레인져고 타이틀은 다 가지고 있어. 그담부턴 대한산악연맹 등산지도자 땄고. 그때 한번 죽을 고비 겪고 서서히 다 비우고 이제 오직 우리 막내딸 150만원만 보내면 난 되니까 그 목표로 살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활동적으로 사는 줄 아는 데 사실은 산이 나를 살려준거야. 나 이렇게 사는 거 아는 사람은 몇 명밖에 없어요. 친구들도 잘 모르고. 우리 가족도. 하다못해 내가 편의점에서 알바를 밤에 했는데, 그럼 동네 사람들 보잖아. 그럼 저 사람 또 뭐 하나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내가 알바 한다고는 생각을 못하는 거야. 옛날에 포장마차 군밤장수도 꽤 오래 했어요. 근데 최근에는 안하지. 난 그런 거에 대한 거부반응은 없어요. 창피하지만. 지하철에서 물건도 팔았어요.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아보면요, 그 분들은 진짜 절박하고 그러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에요. 진짜. 내가 느꼈어. 하고나서 밤에 식당가서 알바하고 그래요. 뭔가 아름다운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이 제대로 펴는 걸 못봤어. 조금만 지원이 되면 되는데. 완전히 생활에 좌절한 사람들은 여기 안 살아요. 이 정도 사는 사람들은 의욕은 있는 사람들이지.


외환통 은행원이 돌아본 IMF

지금 가장 기분 나쁜 게 뭐냐면 IMF는 정부가 정책을 잘못해온 거 아냐 대기업 위주로. 이거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현장에서 체험해보면 아는데 관료들이 나라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 이득을 생각하거든. 그때 재정경제부가 소위 말해서 보면 밑에서부터 위에까지 전부 돈 다 챙겼을 거야. 하다못해 상공부 애들도 다 챙겼어 우리는 눈으로 다 봤다고. 은행원들은 다 외환위기 수습하는데, 그것들은 어떻게든 매각해서 돈 받을까 얼마나 로비가 들어왔겠어. 사실 우리나라가 IMF온 거는 관료들이 잘못해서 온 거지 우리가 잘못해서 온 게 아냐. 대기업들은 무차별적으로 지원해줬잖아.

순진한 우리 국민들은 금모으기 했죠. 나도 했고 다 했어. 눈물도 흘렸어. 그런데 기업은 뭐야 재벌기업은 지네들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오히려 더 좋아진 건 재벌기업들이야. 특히 그때 50대 그룹 안에 있었던. 여의도나 명동 금융기관에서 근무했다고 하면 자금을 보고 외환을 봤다하면 다 아는 게 그때 재벌한테 그렇게 해주면 안되는 거거든. 재벌은 그때 이후로 더 커졌어. 2,3년 뒤에 IMF가 끝났잖아. 이제 사회 양극화가 너무 쎄진거야. 그때보다 점점 쎄진거야. 재벌개혁은 꼭 필요해. 국민이 열심히 해서 이렇게 된 걸 갔다가 이게 말이 되냐고. 최저임금 이러고. 구조적으로 기분 나쁘고 우리나라가 왜 IMF가 왔나, IMF이후에 누가 덕을 봤나, 우리가 왜 이렇게 됐나 생각해봐. 금모으기 했던 서민들은 개판되고 걔네들은 더 부자 되고.

1996년 말부터 우리가 이제 외환이 어떻게 막 이러다가 1997년도에 이러다가 1997년 8월인가 9월에 발표한 거거든요. 실상 97년 초부터 힘든 거고, 정리과정을 거치면서 은행이 없어진 거거든 서서히.

한보는 커넥션이고. 그 커넥션보다 더 큰 건 IMF잖아. 소위 말해서 관청에 있는, 그래서 그거 알죠? 론스타. 다른거 뭐 대동은행, 동남은행, 평화은행 무슨 은행이 퇴출되고 이런 게 문제가 아니에요. 그런 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없어져야 하는 거, 그거 BIS가 그렇게 나빠서 없앤 것도 아니야 사실. 다른 건 더 했는데. 그때는 은행을 찍었을 때 관에서 찍으면 그냥 끝난 거야. 그래서 가는 거고 뭐 나빠서 없어진 게 아냐. 외환은행 같은 게 특히 잘못됐고. 핫머니라고 그러죠? 핫머니. 론스타나 이런 게 다 핫머니잖아. 대표적인. 그게 벌써 IMF때 들어와 있었고. 이제 외환은행은 그게 좀 문제가 되니까 (화제가 된 거지). 벌써 IMF 때도 핫머니 라는게 있었고. 이건 누가 했느냐. 전부 관이야. 관이 뭐야? 정치야. 참 우리나라는 재정시스템 자체가 완전히 민주적으로 바뀌어야해. 투명하게. 그래야지 몇몇 사람이 무슨. 외환이나 이런 거 전문적인 용어도 아니야. 아는 사람은 다 알아. 그런 걸 갖다가 공표를 하고 그래야 하는데. 걔들이 밀실에서 다 한 거야. 하면서 괜히 공개적으로 한다 그런 거지. 진짜 IMF때 왜 은행들이 없어졌을 때 그건 뭐가 잘못된 건지 밝혀져야 하고. 특별히 나쁜 게 없었단 말야. 관의 입김이야. 그걸 밝혀야만 앞으로 이런 일이 없을 거고 투명해지고. 그리고 더 이상은 빈부격차가 커지면 안 돼. 말도 안 되잖아. 말이 돼요? 나도 열심히 살잖아. 여기 열심히 살아 전부.


IMF가 나에게 남긴 것

IMF이후 완전히 바뀌었겠죠. 제 개인적으로 봐도 완전히 바뀐 거고 180도로. 아주 피해를 안 입은 사람은 모르지만 반 이상의 사람들은 아마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바꼈을 거예요. 내 친구도 편하게 은행 있다가 나왔어요. 크게 돈 없고 그냥 사는 데, 이런 건 있는 거죠. 완전히 개인주의가 되가지고 돈도 잘 쓰던 놈이 돈도 절대 안쓰고. 어느 조직에 가서 일하면, 막 40대 중반 후반에 나오니까 절대 조직에 대한 애착심이 없고 언제든 나간다 이런 거. 그런 사회 풍조가 옛날에 평생직장 이런 게 없어진 거지 많이.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거예요.

저 같은 경우에는 첫째 국가에 대한 가치관이 틀려졌고, 국가는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어요. 국가는 존재를 안 해요. 국가라는 건 국민을 보호해야하는 데 그런 게 없고. 내가 나 혼자 살아야한다 이런 생각이 있고. 민족은 좋아해요. 우리 국가는 싫어. 그런 게 있고.

제 자신은 이런 게 있어요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경제적으로 힘들고 진짜 그렇잖아요 다 겪으면서 보니까 세상이 더 좋아져. 옛날에는 몰랐거든요. 힘은 들었지만 몇 년동안 쌓이니까 이게 아름다운 삶이구나. 돈이 있다고 절대 아름다운 게 아니더라고. 옛날에는 술 먹으면 유흥업소도 다녔거든요. 지금은 시장에서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이런 게 좋은 거야. 이게 진짜 인간적이고. 생활의 가치관도 많이 틀려지고. 지금 이혼도 했지만. 행복지수로 보면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해. IMF 전보다 정신적으로 더 행복하고. 아 이 마음이구나 이게 사람이구나. 나의 행복이라는 건 내가 나를 괴롭히면 안 되겠구나. 항상 즐겁게 살아가고. 봉사활동하고 국립공원 가서 쓰레기도 줍고 엊그제도 갔다 왔지만. 난 자주 가요. 난 머리 아프면 쓰레기 주우러 가고 연탄 나르러 가고 해요. 편해. 그런 게 진짜 기쁨이더라고.

내가 성격은 막 이래도 남들한테 내색 한 번 안했어. 사람들이 몰라. 내가 힘들고 이러면 사람들이 다 떠나요. 노점할 때도 마스크 이렇게 쓰고. 두세 번? 본 사람은 있어요. ‘너 뭐하냐?’ 그럼 ‘임마, 현장 체험하고 있다.’ 그래요.

* 구술인터뷰의 전체 내용은 아래 녹음파일과 소장기록물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아카이브에 업로드한 영상 또는 음성 파일이 있는 경우 플레이어가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