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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외환위기아카이브는 IMF를 겪었던 개개인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IMF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구체적인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구술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IMF 시민 구술기록_김희영(가명)
“IMF의 기억은... 대학교에서 자퇴서 내고 나올 때. 엄마랑 같이 갔었는데 울면서 나왔어요.”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왔는데 어느 날 피아노가 없어진 거예요 제 방에.

저는 79년생이구요, 고향은 대전이고 아빠가 직장을 은행을 다니셔서 지점 발령 때문에 이사를 하다가 초등학교 이후부터는 수원에서 살고 있었고, 97년도때 저는 고3이었어요.

아빠가 은행을 다니실 때는 제 기억에 동네에서 차도 있고 집도 있고 꽤 안정적인 생활을 했고 엄마도 일을 하시거나 그러지 않고 저 학교 다닐 동안 보살펴주시고 집안이 엄청 편안했죠. 중학교 때 아빠가 식구들 몰래 퇴직을 사직서를 내고 사업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사업을 중학교 때 시작하시면서 되게 좋았어요. 차도 바뀌고 집도 새로 지어서 살고 그랬는데 제가 이렇게 볼 때는 사업을 하면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구나, 그리고 뭔가 아빠도 더 멋있어 보이고 근데 그 시간이 되게 길지가 않았던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고등학교 1, 2학년 그때 즈음부터 뭔가 엄마가 그 아빠 사업하시는 데 가셔서 같이 일도 하시고 어느 순간부터 ‘힘들어지는구나’ 이런 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초등학교 때 저희가 되게 여유 있게 살 때 아빠가 생일선물로 사주셨던 피아노를 제가 엄청 아꼈었는데, 엄마가 어느 날 그러시는 거예요. “저 피아노를 팔아야 될 것 같다.” 그때 느낌으로 집이 좀 어려워지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는데 엄마가 그 이야길 딱 하셔서 “아 요즘에 잘 안치고 있으니까 필요없어.” 그랬는데 사실 마음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엄마는 당장 쌀을 살 돈도 없었던 것 같아요.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왔는데 피아노가 없어진 거예요 제 방에.

집도 있고, 살고는 있는데 생활비가 없구나 느낌이 들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고. 왜 갑자기 이렇게 됐지? 아빠는 해결을 하려고 되게 노력을 하시는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것 같고. 점점 엄마 아빠가 집에 오는 시간이나 계신 시간이 줄어들고. 뭔가 많이 발로 뛰셨겠죠. 해결하실려고 경제적인 걸. 그런 일이 일어나면서 어느 순간 집이 경매로 넘어가게 되고, 이사를 가야하는 상황까지 온 거에요.


등록금 다시 돌려받았어요. 그 돈으로 보증금 낼 수 있는 데를 찾아서 조금 지상으로 올라가야겠다 그래가지고.

이층집 지어놓고 살았었는데 반지하로 보증금도 없는 월세를 가게 된 거예요, 갑자기. 그때 아빠가 건강까지 안 좋아지시고. 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이고 저는 졸업할 무렵이었죠. 그리고 그렇게 반지하로 이사를 갔는데 아빠는 이삿짐 하나도 옮기지 못할 정도로 건강까지 안좋아지셔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자세히 생각은 잘 안나는데. 엄마가 많이 우셨던 것 같아요. 이삿날 엄마가 어디라고 알려줘서 갔어요. 그냥 주방겸 거실도 아니죠, 문 열고 들어가면 싱크대가 있고 조금 더 들어가면 방 하나가 있고. 거기서 네 식구가. 그냥 그 싱크대 앞에서 이불 펴고 자고. 햇볕도 잘 안 들고. 맨날 항상 우리는 집주인이었고 이사를 다녀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게 처음 이사. 그니까 어릴 때 살던 집에서 좀 더 넓은 집으로 새로 짓고 살다가, 이사를 거의 처음이다시피 해서 간 거예요. 근데 진짜 그냥 어두웠어요. 햇빛이 하나도 안들고, 우리가 갖고 있는 농은 들어가지 않아서 다 버리고. 어두운 방에 아빠가 아파서 누워계시고. 엄마가 많이 우셨어요 그날. 이사가야한다고 하면서. 빨간딱지가 붙은 건 잘 기억이 안나요. 근데 조금 예상은 했던 것 같아요. 점점 생활이, 뭘 팔고 이러니까.

그리고 나서는 이제 엄마가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저는 딱 대학교를 입학 했어야 했던 상황이죠. 입학금이 없으니까 갈 수가 없었는데 저희 친할머니께서 모아놓으신 돈을 주셨어요. 대학교 가라고 입학금이랑 등록금을 주셔서 점수가 좋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원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오리엔테이션까지 갔다 왔는데, ‘내가 이 학교를 다니는 게 맞나?’ 싶더라고요. 우리 집이 지금 엄마는 식당 다니고 계시고 아빠는 아파서 집에 누워계시고 동생은 고등학생인데 이게 맞나 싶어서 자퇴를 했죠 그냥. 그래서 등록금 다시 돌려받았어요. 그 돈으로 보증금 낼 수 있는 데를 찾아서 조금 지상으로 올라가야겠다 그래가지고. 정말 몇 백만원 안 되지만 그 돈으로 보증금을 해서 이사를 했었어요.

아빠 건강이 안 좋아지고 나서, 엄마가 일을 하고 돈을 버실 동안 저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거의 졸업하던 해부터 일 년 정도를 어디에 취직할 엄두보다는 당장의 돈이 급해서 그냥 아르바이트 엄청 찾아다니고 그걸 같이 생활비로 하고. 동생이 또 학교를 다녀야하니까 그랬어요. 그냥 한달한달 하루하루 그랬던 것 같아요. 내가 나중에 뭘 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은 거의 못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커피숍에서도 아르바이트했고요, 뭐 주유소에서 새벽에 할 수 있는 일도 해보고 밤늦게 할 수 있는 일도 해보고. 제가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오고 친구들은 다 대학교를 갔거든요.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더라고요. 제 인생에서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시기 같아요. 알바를 하고 학교를 자퇴하면서부터 친구들이랑 연락을 안했어요 1,2년 정도를. 그냥 혼자만 계속 일하고 아르바이트 그냥 맨날 보면서. 그 신문 있잖아요 요즘에는 인터넷이나 핸드폰으로 보는 데 옛날에는 집 앞에 있는 신문에서 아르바이트 할 거 찾아서 하고, 엄마한테도 어디 가보라고 하고. 그냥 밤에도 하고 새벽에도 하고 그랬었어요.

엄마는 거의 식당. 사실 엄마가 그렇게 사회생활을 많이 하셨던 분이 아니고 젊은 시절을 거의 살림만 하며 저희 키우시면서 보내셨기 때문에 나가서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빨리 찾을 수 있는 일은 거의 서비스직이니까. 그래서 엄마가 고생을 참 많이 하셨었어요. 병원 직원 식당 그런 곳에서도 하셨고 일반 고깃집 같은 곳에서도. 저희 엄마 보면 되게 이쁘시거든요. 이쁘시고 되게 고우세요. 지금도 연세보다 훨씬 젊어보이시고 이쁘신데 고생을 진짜 많이 하셨어요.

아빠는 아프시니까 계속 치료를 받으시고 엄마는 돈을 버시고 하다가 아빠가 몸이 좀 좋아지시면서 돈을 버시겠다고 지방을 가신 거예요. 저희 식구들을 다 두고 혼자 지방에 내려가셨어요. 근데 결론은 또 거기서 아빠 명의로는 빚 문제나 이런 때문에 어떠한 경제활동도 할 수가 없으니까 엄마 명의로 카드랑 대출같은 걸 받으셨던 거예요 지방에 가셔서. 그리고 나서는 또 결정적으로 아프셔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셨었어요. 건강도 못 챙기고 먹는 것도 끼니도 못 드셨던 것 같고, 너무 말라서 다시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다시 오셨죠.

아빠는 제가 느끼기에는 지금은 그래요, 아빠 혼자 잘 살려고 그렇게 하시진 않았을 것 같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들이 많지 않았을까. 그리고 가족들한테 말하지 못하는 가장의 표현하는 방법이나,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 그런 부분들이 많아서 힘드셨겠죠 엄청. 힘드셨을 것 같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아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었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셔서 두 분이 사이가 아빠 돌아가실 때까지, 끝까지 안 좋으셨어요.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 아빠가 은행만 계속 다녔어도 퇴직금도 받으시고 연금도 받으실 거잖아요. 근데 아빠가 분명 나온 데도 이유가 있을 거예요. 정리해고 전에 압박감, 또 승진을 해야 될 때 그런 거가 있어서 빨리 나가야겠다는, 그런 스트레스가 있으셨으니까 나오셨을 것 같아요.


저희 직장에 마지막 정규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 계약직이거든요.

빚이 더 늘어서 엄마까지 뭔가 일은 하고 있고 생활은 하고 있는데 나아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도 다행인 게 제가 직장에 정규직으로 취직을 하게 됐어요. 고등학교밖에 졸업은 못했지만. 그게 그래도 기반이 좀 되었던 것 같아요. 직장은 외삼촌이 병원에 근무를 하고 계셨었고 거기서 사람을 뽑는다 그래가지고 한번 와볼래? 그래서 저는 고를 게 없었어요 사실. 이게 나랑 맞네, 무슨 일을 하네 따지지 않고 무조건 지원했는데 다행히 붙어서 들어가게 되었죠. 거의 저희 직장에 마지막 정규직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다 계약직이거든요. 되게 힘들어요. 지금도 사실. 새로 사람들은 들어오지만 다 계약직이고 일을 할 만하면 다 나가고.

생각해보면 그 IMF 때도 명예퇴직이며, 명예퇴직이라기보다는 정리해고 그런 게 많았고 그 이후에 저는 경제활동을 시작을 했잖아요. 근데 뭔가 한 번도 주변이나 사람들을 봐도 안정적이라는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지금도. 지금도 명퇴는 항상 받아요. 몇 년 이상 근무한 분 중에 원하면 명예퇴직을 해도 되어요. 항상. 그리고 고용자체도 계속 계약직들만 뽑고 있고 뭔가 안정적인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생각들도 언제든 기업의 이윤을 위해 정리해고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조금씩은 있는 것 같고.

제가 딱 20살 10월. 98년 10월달에 지금 직장에 입사를 해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다니고 있어요. 사실 감사한 일이죠. 정규직으로 다행히 취직을 해서. 푸념처럼 일하기 싫을 때는 ‘내가 여기를 안 들어왔으면 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데’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키우면서 살기에는 감사하죠.

직장 들어가고 나서는 그래도 정해진 날짜에 월급이 나오고 좀 많이 좋아졌죠. 우선은 마음이 좀 안정되었던 것 같고. 직장 들어가고 나서부터는 엄마도 많이 걱정이 줄었고. 어쨌거나 병원에 근무하니까 아빠 병원다니는 거에 병원비 부담도 좀 줄었고. 삼촌이 '니가 여기를 다니면 그래도 집에 도움 되지 않겠냐' 해서 많이 권유를 하셨었죠. 힘들지만 그래도 한번 해봐라 해가지고.

제가 불규칙하게 근무를 하니까 엄마가 많은 힘이 되어주셨어요. 엄마를 제가 지금도 모시고 있거든요. 같이 살면서 엄마가 애기도 봐주시면서 저도 같이 직장을 지금도 다닐 수 있게 되었고요. 아이들 케어를 엄마가 너무 잘해주고 계시죠. 오히려 지금 엄마는 엄청 밝아지셨어요. 예전에는 아빠가 팔이 불편하셔서 엄마가 외출도 못하셨었거든요. 끼니때마다 밥을 챙겨드려야되고, 저희 아이들 어릴 때. 애기들도 보시면서 아빠까지 돌보셨던 거죠. 아버지 돌아가실 때 물론 엄청 맘이 아팠죠. 근데 지금은 외출도 많이 하시고 문화센터도 다니시고, 친구들도 만나시고. 밝아지셨어요. 문득문득 힘들고 외로우실 수도 있는데, 지금은 엄마 걱정은 아플까봐. ‘모아둔 돈도 없는데 너네들 힘들게 할까봐’ 그 걱정을 많이 하시죠. 다행히 건강하시고.

올 6월에 근속상을 받았어요. 20년 상. 사실 얼마 안 되신 분들은 와 대단하다 어떻게 20년을 다녀 그러시는데,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너무 빨리 가고 그냥 애기 낳고 결혼하고 나니까 뭔가 다른 걸 할 만한 여유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일을 찾고 싶으면 젊을 때 빨리 찾아라 이렇게 권유를 해주죠. 저도 다니고 나서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근데 섣불리 나갈 수가 없더라고요. 사업하면 아주 학을 떼시는 엄마가 계시고, 뭔가 안정적인 게 필요하긴 하니까. 또 있으면 월급은 그냥 나오니까, 어떻게 보면 안주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 그래서 저는 애들한테는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그래요. 즐거운 일.

대학교를 안 간거에 대한 아쉬움은 많아요. 그때 공부를 좀 더 하고 싶긴 했거든요 사실. 친구들이랑 재밌게 보낼 수 있는 시기에 나는 일을 좀 일찍 시작해서. 사회생활 하면서부터는 되게 제약이 많잖아요. 시간제약도 많고, 그런거에 대한 아쉬움은 있죠. 대학 나온 친구들도 부럽고 지금은. 아이들한테도 ‘엄마는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집이 너무 어려워서 안 했어’ 그렇게 말을 하긴 하지만, ‘엄마는 공부 잘해서 여기 나왔어’ 이런 걸 못하니까. 저희 세대 때는 거의 대졸이거든요. 실업계나 특성화고등학교를 나오지 않는 이상 어디 전문대라도 엄마들이 다 대졸이에요. 뭔가 그런 거에 대해서 제가 자신있게 말 못해주는 게 아쉬워요.


스무살에 닥친 IMF에 대한 회고

IMF요? 음... 기억하고 싶진 않지만 그냥 다시 겪고 싶지는 않은. 그리고 아이들에게 겪게 하고 싶지 않은 일? 국가부도의 날이란 영화를 봤는데 저게 누구의 잘못, 아빠의 잘못이 아니구나. 겪지않고 넘어가면 참 좋겠어요. 또 올 수도 있다고 하는 데 젊은 사람들도 너무 힘들고 저한테 IMF는 또 오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에요.

그 전에 대기업이나 이런 데 다니셨던 분들 어땠는지 모르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지금까지도 뭔가 안정적인 느낌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고용되어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은 또 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거를 동료들과 이야기해보면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겠어 자르면 나가야지."이런 거죠. 계약직들이 너무 많고. 계약을 6개월마다 해요. 2년까지 최대 계약을 할 수 있는 데 6개월마다 해요. 안해주면 딴 데 가야해요. 그게 어떻게보면 자식 일일 수도 있고. 뭔가 안정적인 느낌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월급 오르는 만큼 물가는 더 많이 오르고. 사실 요즘 대출같은 것도 그렇고 빚이 줄고 있어도 또 갑자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취직 이후로 좋아졌어' 그런 건 아니고 당장은 뭐 몇 년 뒤까지는 괜찮지만 정말 내 노후는 잘 모르겠어요. 연금도 내고는 있지만 지금 받으시는 분들 엄청 부러워요. 되게 좋을 때 직장 다니셨다가 아이들 공부 다 시키시고 지금 연금 받으시는 분들은 부러운데, 저희는 사실 받을지 안 받을지도 모르는다는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어가지고. 부모님한테 물려받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하게 아프지않고 직장생활 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그런 느낌이에요.

아이들을 키우면서는 그때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을까 나한테 못 해줬던 게. 아빠가 얼마나 우리한테 많은 기회를 주려고 주고 싶어서, 더 잘 살고 싶어서 얼마나 노력을 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는 아빠가 은행 그냥 다녔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더 잘해보려고 했었던 것 같단 생각이 많이 들고, 그때 학교를 못 다니고 용돈을 못주고 그랬을 때 엄마는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이 많이 들고. 나는 아이들이 원할 때 해줄 수 있는 부모여야겠다 이런 생각도 많이 하죠. 아이들을 키워보니까 오히려 그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해야 하나, 엄마는 잘 해드리고 싶어요. 아빠한테는 그렇게 잘 못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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