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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외환위기아카이브는 IMF를 겪었던 개개인의 기억을 들여다보고, IMF사건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 구체적인 경험을 기록하기 위해 구술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IMF 시민 구술기록_김영재(가명)
“내려가는 출구는 있어도 올라가는 입구는 없더라고요.”

 

당시만 하더라도 사회적 분위기가 한번 직장은 평생 직장이라는 것.

저는 1958년에 부산 한적한 변두리, 해운대 인근에서 태어났어요. 부모 슬하에 장남이었고, 여동생만 셋이 있었어요. 제가 독자고 장남으로 부모님 뒷바라지로 대학까지 다녔습니다. 사실 제 의지로 다녔다기보다는, 부모님이 대학 간판이라도 따라고 우스개 반 진담 반으로 했는데 학교 졸업하고 바로 군에 갔다왔어요. 제대하고 나서도 뚜렷하게 직장다운 직장을 잡진 못했구요. 대학 전공과목이 그 당시에 크게 활성화 되지 않은 식품영양학과를 나왔거든요.

그래서 이런저런 일을 전전하고 그러다가 직장도 없는 상태에서 스물일곱에 결혼을 하게 되었어요. 결혼하고 나서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당시에 저희 집이 고즈넉했지만 굉장히 빈곤했어요. 그래서 등록금도 한번에 못내고 사남매가 교대식으로 내는. 그런 과정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결혼하고 나서도 아버님 어머님 밑에 제대로 된 직장 없이 버티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울로 무작정 와이프하고 같이 올라가서 새로운 것을 해보자, 했죠.

82년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서울에 일가친척도 없고 지인이나 친구도 없으니까 일단 1년 정도 당시에 접하기 쉬운 건설직 노동을 하다가 우연히 길에서 학교 선배를 만났어요. 만나서 술 한잔 하면서 대화를 하는데 선배가 대우건설에서 일하더라구요. 제가 서울에 연고도 없이 막일하면서 산다고 하니까, 자기가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그러고 두 세달 기다려보니까 대우건설에서 특채가 있다고 해서 이력서를 써서 대우건설에 취직을 했어요.

제가 전공이 식품영양이다보니까, 그쪽 직책으로 취직이 되었는데 국내에서는 후생 부문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면접보고 취직 되고 바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일주일 만에 여권 받아서 해외 현장으로 나갔어요. 가족도 놔두고 저 혼자만.

그 당시 했던 일이 스위스 해외 건설 현장의 의식주와 관련한 복지관리 업무였어요. 기숙사 사감 겸 식재료나 영양 담당. 스위스 캠프에는 천여 명 정도가 일했는데, 속소 관리하고, 의식주 관리하고, 물품 짜서 구매하고 식단표도 짜고 이런 일을 6년 정도 했습니다.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갔다가, 그리스로 갔다가, 최종적으로는 아프리카에 있는 석유 회사 현장까지 갔죠.

이렇게 외국에서 6년을 일하다가 국내로 들어왔는데, 국내에서는 후생직이 크게 역할이 없다보니까 보직 변경을 했어요. 그래서 현장 외근직으로 기술을 배울 겸, 기계 분야에서 냉동 분야를 전담해서 일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사회적 분위기가 한번 직장은 평생 직장이라는 것. 저도 대우건설이라는 닉네임이 누가 봐도 알아주는 거니까 자부심도 있고, 여기서 평생 뼈를 묻는다는 생각을 가졌죠. 내가 오너는 못되더라도 회사 내에서 전문 분야에서는 엄지 손가락으로 꼽히는, 단 하루를 하더라도 그렇게 하고 물러나고 싶다는 포부로 일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책이 없는거에요. 대기발령이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IMF라는게 왔는데, 사실 저는 IMF가 뭔지를 몰랐어요. IMF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가 활황기였고 경제가 좋고 그랬으니까 피부에 와 닿지도 않았고. 지나가는 불경기로 생각했는데, IMF가 터지고 나서 두 달인가 지난 즈음에 본사에서 돌아오라고 그러더라구요. 내근직으로 근무하라고. 나는 해외에서는 관리 파트 소속이지만 후생이었고, 국내에서는 기계파트여서 내근직을 한번도 안해봤는데 내근직으로 발령났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책이 없는거에요. 대기발령이었어요. 이게 뭔가, 싶어서 알아보니까 다른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 얼버무리더라고.

조금 지나고 보니, 소문으로 들어보니 국제통화기금에서 구제금을 받고 긴축을 하는 과정에서 제가 지방대 출신이고, 보직도 핵심파트가 아닌 후생 쪽이니까 커트하는 과정에서 우선순위에 걸린거죠. 그 당시에 회장님이 연세대 출신이라서 그 대학 출신이 요직을 다 차지하고 있었어요. 누가 비비고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러다보니 학연, 지연으로 특채도 많고. 공채는 형식적으로 한번 씩 하고. 지방대는 특히 비비고 들어갈 데가 없으니, 회사도 투명하지 않은 상황이었다는거죠. 지구는 둥글고 할 일은 많다 하지만 그건 그 양반이 하는 소리고, 하고 싶어도 발판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보직 없이 (대기발령 상태로) 거기서 두 달 정도. 하루 일과는 통로 쇼파에 앉아서 신문이나 보고, 점심 시간 되면 구내식당 가서 밥 먹고. 일이 없어요. 일도 안시키고 뭘 해도 터치도 안하는데 근무시간 중에 회사 밖으로는 나가지 말래. 사람이 철창 없는 감옥에서 허송세월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굉장히 스트레스가 쌓이더라구요. 그래서 집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했죠. 회사에서 대기발령을 받았다, 지금 굉장히 힘들고 그래서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집사람은 가정도 있고 자식도 있고 그런데 가장이 그만두면 가정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버텨야 하지 않겠냐고 해서 세 달을 버텼어요. 우리 집사람이 대우 다닌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도저히 못견디겠으니 그만두겠다고 집사람에게 애원을 하다시피 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일자리에 데미지가 클 줄은 모르고, 내가 조그만 회사라도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죠.

98년 초에 그렇게 대우를 그만뒀는데, 일단 중소기업을 두드려 봤어요. 그동안 있던 인맥으로, 공채로 두들겨 보고. 그런데 다 안되는거에요. 일단 사람을 뽑는데가 거의 없어요. 뽑아봤자 한 두명. 지인을 찾아가도 자기도 힘들다고 그러면서 커피나 마시는 정도고. 취업 쪽으로 대화를 나누면 한발 빼더라구요. 이게 힘들긴 힘든 시기구나 싶었죠. 경기가 그만큼 침체되었다는게 그때부터 머릿 속에서 서서히 깨우치기 시작하는거에요. 긴축이라는게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고.

IMF 전후에는 경제 위기를 크게 인식을 못했어요. 3개월 대기 발령 중에도 집사람이랑 애하고 2박 3일 놀러갔어요. 그만큼 여파가 클지 몰랐다는거에요. 그 후에도 중소기업은 취직할 수 있겠지, 그래도 큰물에서 놀았으니까. 그런 희망이랄까 망상이 있었죠.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취직이 안되니까 IMF가 무서운거라는걸 느끼기 시작한거죠.

IMF 오고 나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정부에서는 정책적으로 한 직장을 평생 직장으로 생각하고 다녀라, 이렇게 홍보하고 다녀서 나도 그런 자부심을 가졌는데. 아마 큰 회사건 작은 회사건 그 당시 일하던 사람들은 다 그런 생각을 했을거에요. 그래놓고 갑자기 퇴직 처리할 때는 정부에서 고개를 돌리는. 정부에 대해서 서운한 감정을 가졌죠.


가장이 무능해지니까 제일 먼저 흔들리는게 가정

그래서 그렇게 일년이 흘러갔어요. 일년을 놀다보니 제일 먼저 무너지는게 가정이더라구요. 가장이 무능해지니까 제일 먼저 흔들리는게 가정. 제가 크게 어디서 월급 말고 딴걸 벌어온게 아니다보니 저축한게 많지도 않았고, 자녀 교육도 시켜야하고 들어가는 돈이 많으니까 무너지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때까지 직장 잡지 못하고 왔다갔다 오락가락 하고, 약간의 홧병 같은 것도 생기고. 일년이 지나니까 가진 돈도 떨어지고, 가정이 무너지는데. 와이프하고 그 이후로 티격태격하면서 가정불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라구요. 마음이 진짜 너무 좀 그랬어요.

어느날엔가 밖에서 지인들이랑 술 한잔 먹고, 자고 아침에 일어나니까 집사람이 부엌에서 뭘 하고 있는데 옆에 노란 봉투가 하나 있어. 열어보니까 이제 우리 인연은 여기까진가 보다, 하는 내용하고 서류가 들어있어. 내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부모님이 열심히 고생하셔서 가르친 보람이 종국엔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에 사람이 무너지더라구요. 아침이었는데 너무너무 눈물이 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소리는 못내지만 얼굴을 벽에다 파묻고 진짜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도 몇 개월 동안 와이프를 이해시키고, 내가 해본다고 최대한 했는데 잘 안되더라구요. 지치다보니 와이프가 다시 한번 (이혼을) 생각하면 안되겠냐고, 종이를 꺼내더라구요. 근데 그 종이를 물리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이걸 설득하고 화해하고 구슬려보기엔 제 자신이 명분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알았다, 여기 놓으라고 하고. 당신이 생각한 최선이라면 나도 받아들여야지 어쩌겠냐. 그래서 부모님에게는 얘기도 없이, 도장을 찍었죠. 대신 내가 지금 이렇게 무능하니까 당신에게 줄 위자료가 없다, 대신 지금 살고 있는 집 명의를 당신 앞으로 돌려주겠다. 그리고 아이는 아빠가 키우는 것보다 엄마가 키우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조건으로 협의 이혼을 했죠.

사실 가정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그런 뉘앙스를 예감하긴 했어요. 어느 정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에이, 내 세대까지는... 그런 생각.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요즘 젊은 친구들이 안좋게 들을지는 몰라도 젊은 친구들은 부부가 의견이 안맞으면 헤어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근데 저희 부모님 세대가 저희한테 얘기할 때는 남자고 여자고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결혼을 하면 부부싸움을 하던 뭘하든 헤어지면 안된다는게 가치관이었어요. 내가 거기 막차를 타고 있었겠지. 우리 세대 사고방식은 그런 기조가 있기 때문에, 집사람이 애도 있고 그러니까 이혼을 할거라고는 쉽게 생각 안했었던거죠.


나만 굴곡이 심하면 되는데 나로 인해 주변까지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되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이혼한 것이 2000년도 가을철로 기억해요. 집을 나오는데 수중에 300만원이 있더라구요. 300만원으로는 딱히 갈데가 없어서, 물건들은 집에 보관하고 일단 몸만 나가겠다고 해서 이리저리 전전했죠. 여관에도 며칠 묵고, 친구 집에서도 투숙하고. 그러면서 다시 직장을 알아보다가, 한 군데 서류전형에는 합격을 했는데, 당뇨하고 혈압이 있다보니 신체검사에서 떨어지더라구요. 그렇게 조그만 기회도 박탈당하고.

그러니까 사람이 무너지면서 술을 가까이하게 되더라고. 가장 괴로운건 누구를 원망하고 그럴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으로서의 무능함. 가정이 해체되었다는 것. 그거만 머릿속에 박혀 있더라구요. 와이프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딸은 뭘하고 있을까, 공부는 하고 있을까, 등록금은 냈을까, 이게 머리에 꽉차 있고.

그래서 술을 많이 접하게 되고, 가진 돈도 어느 정도 떨어지고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내 권리든 정체성이든 다 팽개쳤어요. 어느 골방에서, 내가 오늘부로 나의 자존심, 권리, 정체성을 저기 보이는 휴지통에다 꾸깃꾸깃해서 다 버리겠다고 그랬어요. 쉽게 말해서 막가는 인생처럼 살겠다고. 아무 생각 안하겠다고. 술 먹고 싶으면 먹고,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살지 않겠다고, 그러고 막 살았어요. 술먹고 행패도 부리고 돈도 안내고. 쉽게 말해서 완전히 구렁텅이 속에 빠진 인생을 살았어요. 주변에 저처럼 가난하고, 노숙하시는 분들이 있잖아요. 저도 노숙 구렁텅이로 빠지면서 노숙하시는 분들 많이 괴롭히기도 했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운동도 했는데, 그게 이렇게 나쁜데 쓰일줄은 몰랐지만 그렇게 살았어요. 청결하지 못한 음식을 먹고, 청결치 못한 잠자리에서 자고 그러니까 정신만 뭉개지는게 아니라 육체도 같이 뭉개지더라구요.

저는 노숙은 통틀어서 한 두달 했나? 어쨌든 쪽방이든 여관이든 여인숙이든... 쪽방도 크게 오래 안있고 여관이나 여인숙에 쭉 있었어요. 삼시세끼는 최소한 여력이 있으면 좋은데 그게 안될 때도 있잖아요. 그럴 때는 무료급식 먹기 위해서 노숙인들하고 어울려고 먹고. 사실 잠자리만 아닐 뿐이지 생활은 노숙인들이나 나나 같은 생활을 했으니까.

그러다가 우리 어머니가 몇년만에 저를 오라고 해서 부산에 내려가서 솔직하게 말씀드렸어요. 어머니가 많이 우시더라구요. 같이 울었어요. 그러다보니 좀 마음이 그렇더라구요. 인생 굴곡이, 나만 굴곡이 심하면 되는데 나로 인해 주변까지 굴곡진 인생을 살게 되다보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우울증이란 우울증이란게 다 오기 시작하는데, 어디 올라가면 여기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을 것 같다는. 10층 건물에서 한번 뛰어내려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 생기고. 집에 있으면 숨이 가쁘다고 할까, 화를 못참을 때 생기는 현상 같은. 갑갑한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제가 저를 다스리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어머니가 딱부러지게 말씀하시더라구요. 너 이놈 한번만 더 그러면 나는 자식으로 생각 안하겠다, 너 이러라고 엄마 아버지가 너 공부 가르친거 아니다.

그 말을 듣고 이제 내 갈림길에 도장을 분명히 찍어야겠구나, 이렇게 살다간 또 안되겠다. 삶의 방법이 잘못된 걸 안 순간에는 다른 길로 접어드는게 인간이잖아요. 그래서 이 길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게 한 2005년도 말? 2006년도 초. 일단 주위에 있는 술친구를 다 끊었어요. 내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교통정리가 필요하겠더라고. 자리를 떠서, 딴 곳에서 친구가 없더라도 혼자 사는게 새 출발의 시작점일 것 같아서 술도 끊고 이주를 했어요. 나이도 찼고 할 수 있는게 없어서 여관에 장기 투숙 끊어놓고 일용직을 다녔어요. 거기서 한 3,4년 살았죠.

저는 처음에 저는 이주하면서 액자를 하나 갖다놨어요. 소주명이랑 똑같은 '처음처럼'. 그 액자를 하나 사서 건 게 지금도 있어요. 내 마음이 흐트러질 땐 지금도 그 액자를 봐요. 처음 내가 이 길이 잘못된 길이고 새 길을 다시 가야겠다, 그랬을 때 그 마음가짐. 그걸 잊지 않으려고 내가 수시로 봐요. 그때에 비하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안정이 됐을 뿐 아니라 제 철학이라는 게 어느 정도 심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왜 기업 오너는 살려주는데 기능공들은 안살려주는지.

막 산다고 해도 그냥 살아지진 않잖아요. 잠자리가 필요하고 먹을게 필요하고. 저는 사실 노숙 같은 생활을 했지만, 잠자리나 먹을 것은 최소한의 따뜻한 잠자리, 최소한의 음식은 먹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때 신용카드를 발급 받았는데, 카드를 쓰기 시작한게 연체되기 시작했죠. 새 길을 걷는데 이게 걸림돌이 되더라구요.

그러다가 2006년 가을인가, 파산을 통해서 빛 탕감이 된다는 걸 알아서 상담을 받았어요. 근데 원금이 한 300만이고, 이자까지 해서 800만원인가 그랬는데, 파산을 하려면 또 천만원 이상이 되어야 파산이 된다. 아직 근로능력이 있어서 분할 상환을 해야한다고 하더라구요. 나도 그러곤 싶은데 일자리가 없고 일용직 근로를 하다보니, 소득이 들쭉날쭉해서 일단 파산 신청을 하고 싶다고 해서 넣어봤는데 노무현 정부 시절에 다행히 파산처리가 되었어요. 나중에 술친구 멀리하고 그러면서 사회적응을 하다보니 기초수급자 제도를 보게 된거에요. 제가 가능성이 있어서 동사무소 상담원에게 물어보니까 진단서를 떼오라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된거죠.

저처럼 없는 사람들, 긴축을 해서 회사에서 퇴사 당하고 생활고가 빈곤하다 보니까 카드도 쓰게 되고. 물론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노숙인도 분리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게, 왜냐면 정부에서는 IMF 이후에 가난의 구렁텅이에 빠진게 개인의 책임이라고 해서 정부에서는 안돌봤어요. 그렇게 긴축을 하고 뭘 해도 기업은 안쓰러뜨렸어요. 물론 우리 나라가 수출정책을 쓰는 나라니까 저도 이해는 해요. 근데 그 수출 전선에, 일선에 누가 있냐, 기능공들이 있는거잖아요. 근데 왜 기업 오너는 살려주는데 기능공들은 안살려주는지.

나쁜 사람이 천성적으로 나빠서 나빠지는게 아니라 사회가 사람을 나쁘게 만들잖아요. 저도 학교 다닐 때나 직장 다닐 때 성격이 굉장히 내성적이라 말도 표현도 제대로 못했어요. 근데 나락에 떨어지면서 악만 남으니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악으로 밖에는 방어할 수단이 없더라고. 그러다보니 사람이 자꾸 나빠지는거에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거리에 있는 아저씨들 보면 보이는 쪽만 보는게 아니라 등 뒤도 한번 쳐다보고, 앞에 모습만 보고 나쁜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다고 생각해요.

저는 나락으로 빠지면서 오히려 철이 든거 같아요. 성장 과정에서 가난했지만, 독자고 아들이라고 남아선호사상에 따라 컸어요. 그러니 커서도 안하무인으로 생활하고. 세살 버릇이 여든 간다고 하루아침에 변하진 않잖아요. 그런데 나락에 빠지고 내 주변엔 아무도 없으니까... 좀 후회스러운게 그 당시 누군가 나에게 좀 빨리 손을 내밀어줬다면, 내가 그 손을 잡았을텐데. 그 당시에는 주위에 손 내미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눈이 어두워서 그걸 보지 못했어요. 그러다보니 나 혼자 외톨이라는 생각에 자포자기하게 되고. 우리 어머니가 자식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한 마디에 충격을 받고 아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러면서 철이 들고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 시작했고. 지금도 어머니 주무실 때 매일 저녁 안녕히 주무시라고 해요. 어머니가 동생 집에 가거나 하면 매일 전화해서 저 이제 퇴근했습니다, 그래요. 어찌보면 마마보이겠지만, 어머니도 그걸 좋아하시고 아버지도 안계시니까 저에게 의지를 하고 그러더라구요.

이제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내가 비로소 인생의 철이 드는 시기였구나 그래도 저는 만족해하는 게 그래도 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는 그 자체. 그 수렁에 빠지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빠졌으니까, 누구를 원망하는게 아니라 그게 내가 철이 든 계기점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제 인생을 흔들어놓기도 했지만 인간의 길을 제대로 가르쳐준 것도 같다는.


IMF가 끝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저는 (외환위기의 영향력이) 끝났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기능공들은 회사하고 계약관계를 맺으면서 기술을 제공한 죄밖에 없어요. 그 기술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땀흘렸구요. 정책이 잘못되어서 경제가 쓰러지니까 한 직장이 평생직장이라는 구호 자체가 없어져버리더라구요. 개인의 빚이나 모든 채무 그런 건 금전관계는 개인이 진 거니까 개인이 책임져라. 그러면 저는 그런 생각을 해요. 범죄의 구성도 원인이 있는 거잖아요. 원인제공은 정부에서 한 거예요. IMF라는 걸 정부에서 터뜨려가지고. 그 당시에 제가 알고 있기로는 국고에 320억달런가 있었는 데 갑자기 210억달러로 줄어들어버렸어요. 통화를 안정시키기위해서 몇달 동안 막 풀어제끼는 바람에. 그리고 일본이 우리나라가 위기에 처한다는 걸 직감하고 투자했던 달러 다 회수해가는 바람에. 그렇게 만들어놓고 밑에서 땀 흘린 사람한테 책임져라? 금반지, 금목걸이 십시일반하고 허리띠 졸라매자고 정부에서 그렇게 난리쳤습니다. 없는 사람 있는 사람 다 갖다냈어요. 그런 식으로 정부에서 필요할 때는 허리띠 졸라매자고 하고, 개인이나 없는 사람이 생계 목적으로 채무를 지는건 개인 책임이니까 너네들이 알아서 해라, 국가가 그런 말은 하면 안되는거죠. 분명히 그런 원인을 제공했으면 거기에 맞는 마무리까지도 정부가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IMF를 기점으로 이걸 급속도로 느끼기 시작했는데요. 내려가는 출구는 있어도 올라가는 입구는 없더라고요. 고속도로 달리다가 내려가는 톨게이트는 있어도 올라오는 톨게이트는 없어요. 그만큼 사회안전망도 빵점이고. 인도에 카스트 제도 있잖습니까. 우리나라도 표면적으로는 없죠. (그런데 실제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조건을 철회시켜주면서 없는 사람에게는 그걸 쪼개고 쪼개서 무 쪼개듯이 쪼개가지고 조건을 붙이고. 홍보는 물론 (수혜를 받기) 쉬운 것처럼 하지만 막상 문지방 넘어가기 힘들듯이. 저는 그런 식으로 계급사회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게 IMF이후 우리나라가 그렇게 이렇게 진행이 된 것 같아요. 단지 제가 바라는 건 제발 좀 곤경에 처한 분들, 특히나 채무를 지신 분들, 이런 분들은 정책적으로 법으로든 이자조정을 하던 뭐를 하든 분명히 반드시 생계형 채무자들은 좀 정리를 해주고. 쉽게 말해서 금리가 올라가면서 채무자의 금리도 같이 따라 올라가요. 지금 있는 금리도 해결 못하고 있는 데 금리가 올라가면, 이 사람들의 금리도 따라 올라가면 안된다는 거죠. 빈곤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채무는 해결을 하고 금리를 올리든가 그래야지. 이 사람도 새롭게 생활을 할 수 있고 사회 이바지를 할 수 있고 자기 몫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너무 고양이 쥐 잡듯이 하지 말고 쥐도 도망갈 구멍을, 족쇄를 채워놓고 직장을 못들어가고 직장 들어가면 압류통지하고 이래서 창피라는 창피는 다 주고 퇴직하게 만들고. 이러면서 돈은 내라하고. 돈을 못버는 데 어떻게 돈을 갚습니까. 이걸 어떻게 해결해주고 이자를 올려받든 내려받든 정책을 펴야하는 게 원칙 아니냐는 거죠. 이거 놔두고 이자만 착착 경기가 안좋다고 따라 올라가면 경기가 나쁜 사람들은 더 허덕이고 그러니까 자살률도 올라가고.

그래서 제가 언젠가 모 신문을 보니까 한번 신용불량자였던 사람이 신용 회복하고 일반인보다 신용이 두 배로 더 좋대요. 왜냐, 한번 겪었잖아요. 당했잖아요. 그래서 하여튼 정책적으로 바람이 있다면 최소한 IMF를 거치면서 먹고살기위한 생계형 채무자. 그런 부류만이라도 (구제를) 해달라는 거죠. 마지막으로는, 조건이 많은 복지는 복지가 아닌 거죠. 조건 없는 복지가 복지인거고, 조건없는 빈곤 탈출이 진솔한 빈곤 탈출이지 조건 있는 빈곤 탈출은 빈곤 탈출이 아닌거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빈곤 탈출한 사람은 제발 사회안전망이 촘촘하게 있어가지고 떨어지더라도 한꺼번에 나락으로 가지 못하게끔 제도적으로 만들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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