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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외환위기 당시, 재벌의 무분별한 경영 및 재벌에 대한 부실대출이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재벌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게 일었습니다. 당시 IMF 프로그램과 정부의 재벌 개혁안은 무엇인지, 이러한 안이 어떻게 시행되었는지, 재벌개혁이 반쪽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원인과 과정은 무엇인지 김경필 선생님과 함께 짚어봅니다.

98년 1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 삼성 이건희,현대 정몽구,LG 구본무,SK 최종현 회장 등 4대 재벌그룹 총수들과 조찬간담회를 갖고 국제통화기금(IMF)체제 극복을 위한 대기업의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요청하였다.

98년 1월 13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와 4대 재벌그룹 총수들과 조찬간담회 (자료:e영상역사관)

1. IMF프로그램과 정부의 재벌 개혁안

단기 대외부채가 외환보유고를 크게 초과하는 상황에서 정부는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구제금융을 받기 위해 정부는 IMF와 여러 차례 협상을 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이른바 ‘IMF프로그램’이 만들어졌다. IMF프로그램은 다음 세 주체의 의지가 결합된 것이었다(지주형, 2011: 248-250). (1)IMF의 표준정책 (2)미국 재무부와 월가 금융자본 (3)한국 경제관료. 이들은 한국경제가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경제를 개혁하려 했다. 이들에 따르면 1997년의 위기는 많은 부분 정부의 지나친 경제개입과 재벌의 방만한 총수경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래서 프로그램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포함하고 있었다.

기업 부문에 대한 IMF프로그램의 제시안은 다음과 같다(지주형, 2011: 249). 첫째, IMF는 정부가 은행경영과 기업구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시했다. 둘째, 미국 재무부와 월가 금융자본은 해외 금융기관의 국내 진입과 주식 및 채권투자 자유화를 요구했다. 셋째,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중앙은행 독립을 말하는 한편, 기업은 (1)회계 작성의 투명성 증진, (2)부채비율 감축 (3)상호지급보증 해소 (4)사업전문화를 지켜야 한다고 제시했다. 이들은 재벌의 회계조작과 부채에 기초한 강한 성장 위주 경영, 많은 이들이 문어발식 확장이라 불렀던 비관련 다각화, 주주가 아닌 총수가 모든 계열사를 통제하고, 그룹 자원을 방만하게 사용하는 것이 위기를 일으켰다 생각해서 이를 바꾸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해외의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기업, 성장보다는 단기 이익을 추구하는 부채가 많지 않은 기업, 총수가 아닌 주주를 위한 경영을 펴고, 전문 영역에서만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 재벌을 탈바꿈시키려 했다. 즉 재벌을 미국기업과 유사한 형태로 재편하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IMF프로그램은 정부/여당과 재벌이 노동의 반대로 유예했던 정리해고와 파견근로 도입을 허가하기도 했다.

정부는 IMF프로그램에 따라 재벌개혁에 나섰다.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기획단장이었던 이헌재는 기업구조조정 5원칙을 만들어서 시행했다. 첫째, 재벌은 투명성 강화를 위해 결합재무제표를 도입하고 핵심기업 재무정보를 공개해야만 했다. 둘째, 총수지배를 유지하는 주요 수단 중 하나였던 상호지급보증을 해소해야 했다. 셋째, 자기자본을 늘리고 불필요한 사업과 자산을 정리해서 재무구조를 개선해야만 했다. 특히 정부는 재벌에게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감축하도록 지시했다. 넷째, 사업전문화를 통해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중소기업과 협력을 강화해야했다. 정부는 대재벌 간 사업을 교환하는 이른바 빅딜을 주문했고, 비핵심계열사를 분리해서 정리하도록 권고했다. 다섯째,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해야만 했다. 비상경제대책위원회는 재벌 총수를 주력 계열사 이사로 선임하는 안을 제시하는 동시에, 30대 재벌 및 기타 상장사의 외부감사 위원회 및 사외이사 위촉을 의무화했고, 소액주주권의 신장과 30대 재벌의 기획조정실 폐지 등도 함께 제시했다.

2. 재벌의 저항과 절반의 실행

재벌은 IMF프로그램이 자신을 위기의 원흉으로 여기고, 지배구조 재편과 구조조정을 지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따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재벌은 일단 IMF프로그램을 수용한다고 발표해야만 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미증유의 위기를 관리하는 상황에서 권력은 필연적으로 위기관리의 주체인 정부로 쏠리게 되는데, 이때 재벌이 정부 방침에 노골적으로 반발할 경우, 자칫 그룹이 파산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위기로 재벌의 정당성이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재벌을 비판하는 논의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방면에서 쏟아져 나왔고, 부정적 인식이 광범위하게 펴져 있었다. 게다가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는 총수지배를 비판하며 소액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재벌은 사회적 압력을 무시하고 정부의 방침을 나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경제가 회복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재벌은 태도를 바꿨다. 재벌은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발 빠르게 사회공헌활동을 크게 늘렸고, 위기의 해결책으로 수출 확대를 제시하며 ‘500억 달러 흑자달성 운동’을 폈다.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수출이 부각되면 재벌의 중요성이 다시금 상기될 수 있고 손상된 정당성을 다시금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벌은 정부의 개혁방침을 비판하고 속도조절을 강조하는 한편, 경제회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규제를 혁파하는 것이라 주장했다(전경련, 2011: 61, 608-610, 648-649; Kim, 2019: 31-32).

재벌이 가장 크게 반발했던 것은 지배구조를 개편하는 것이었다. 외국 금융자본이 국내에 진출해서 우량 계열사의 지분을 일정부분 갖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지만, 이들은 총수지배를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재벌은 정부와 여당에 수차례 강력하게 의사를 개진했고, 결국 지배구조 개편을 상당부분 무력화시켰다. 이들은 총수지배를 뒷받침하던 기획조정실을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것으로 이름만 바꾸어 존속시켰고, 사외이사와 감사에 형식상으로만 외부인사인 이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소액주주권 보장에 있어서도 정관에서 집중투표제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저항했으며, 계열사 간 출자를 확대하고 지속적으로 부실계열사에 대한 금융지원을 진행했다. 정부는 재벌이 자사주 관리를 통해 주가를 부양하고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게 했고, 유사한 목적으로 지주회사 도입과 출자총액제한제도의 일시적 폐지를 단행하기도 했다(전경련, 2011: 619-623; 지주형, 2011: 368; 이병천, 2014: 139).

하지만 IMF 프로그램과 정부의 모든 재벌개혁 방침이 무력화된 것은 아니었다. 재벌은 정부의 개혁 방안에 대부분 반대했지만(전경련, 2011: 608-643), 미국식 회계기준을 도입하고, 회계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 부채비율을 감축하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것은 수용해야만 했다. 실제로 재벌은 단기간에 매우 빠른 속도로 부채비율을 낮췄다. 1998년 5대 재벌과 6-30대 재벌의 부채비율은 각각 335.92%와 282.18%였는데, 이 수치는 1999년 각각 184.05%와 219.33%로 급락했고, 2001년에는 128.88%와 187.25%를 기록했다(이윤호, 2005: 226, 250). 이때 부채비율을 낮추지 않고 과거의 방식 그대로 경영을 했던 대우는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체되었다. 재벌의 경영방식은 이때를 기점으로 매출과 성장, 투자보다는 현금흐름과 단기수익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재편되고, 이는 배당성향의 증가(서환주, 김상식, 이영수, 2011: 139) 및 노동에 대한 전면적인 유연화 공세와 함께 진행되었다.

한편, 정부의 사업전문화 요구는 부분적으로만 관철되었다. 정부의 빅딜과 워크아웃 요구는 특정 재벌의 계열사 인수나 합병, 청산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재벌은 이를 통해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과잉투자를 조정할 수 있었다. 또한 기존 지배영역의 독점을 공고화시킬 수도 있었다.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재벌의 계열사는 줄어들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30대 재벌의 계열사 수는 1997-2000년 동안 819개에서 544개가 되었다. 이들의 평균계열사 수는 27.4개에서 18.1개로 줄었고, 5대 재벌의 평균 계열사 수는 52.4개에서 36개로 줄었다. 30대 재벌의 영위업종도 1997년 19.8개에서 2000년 15.3개로 감소했다. 재벌의 계열사나 영위 업종은 분명 줄었지만, 이른바 ‘문어발식 확장’을 근절시키거나 전문화된 기업으로 탈바꿈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3. 개혁 이후의 재벌

IMF, 미국 재무부 및 월가 금융자본, 한국 경제관료들이 함께 만든 IMF프로그램은 재벌의 불투명하고 방만한 경영이 위기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사실상 재벌을 당대의 미국기업처럼 바꾸려고 했다. 주주가 중심이 되는 투명한 지배구조, 전문화된 사업영역, 단기순익과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경영을 이들과 한국 정부는 원했던 것이다. 동시에 관료와 정부는 재벌들이 이전부터 요구했던 노동유연화를 전면 시행할 수 있게 했다. 재벌은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에 특히 강하게 저항해서, 많은 부분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었고, 비관련 다각화를 일부분만 축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외국인 투자자들이 자유롭게 투자를 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부채비율을 낮추고 현금흐름과 단기수익, 배당을 중시하는 경영을 해야만 했다. 즉 1997년 위기 직후 재벌은 총수가 이전처럼 지배하고 소유하는 상황에서 매출과 성장, 투자보다는 현금흐름과 단기수익, 배당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그룹을 전환시키며 전면적인 노동유연화를 추진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서환주, 김강식, 이영수. 2011. “금융화는 한국기업들의 설비투자 부진을 초래하였는가?”. 『경상논총』. 29(3): 137-163.
이병천. 2014. 『한국 자본주의 모델: 이승만에서 박근혜까지, 자학과 자만을 넘어서』. 책세상
전국경제인연합회. 2011. 『전경련 50년사』.
이윤호. 2005. 『재벌의 재무구조와 자금조달』. 나남출판.
지주형. 2011.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책세상.
Kim, K. 2019. “Crisis Management in South Korea and the Hegemonic Strategy of the Chaebols”. Monthly Review, 70(11): 22-34.

집필자 | 김경필
고려대 사회학과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논문에서는 재벌의 자본축적전략을 분석했다. 사회변동과 발전, 정치경제현상을 연구한다. 최근에는 '경제민주화 정책', '신자유주의화', '재벌의 시민사회전략'을 설명하는 논문을 썼다. 현재 고려대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