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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IMF’로 기억되는 1997년 외환위기는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발생한, 글로벌한 스케일의 사건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1997년 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원인과 전개과정, 결과와 그 의미에 대해 짚어봅니다.

위기를 현실화시킨 정세적 계기들

포스트-플라자 시대 동아시아 경제가 과잉투자 경향성, 금융자유화에 따른 과잉유동성, 통화위기 가능성은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동안은 전면적으로 발달하지 않고 흡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재된 위기경향성은 정세적 계기들과 결합하여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국이 자본주의적인 지구적-지역적 생산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역플라자 합의와 더불어 엔화 버블이 붕괴하였다는 것이다.

먼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시장경제는 농촌과 향진기업을 중심으로 점진적인 발전을 해왔지만, 그것이 앞으로 어떤 방향을 가지게 될지, 계획과 시장의 요소를 어떻게 결합하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계기로, 중국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지향하기 시작한다. 중국은 저렴한 노동력과 우호적 환경을 바탕으로 동부 연안지역에 대대적인 수출산업단지를 육성한다. 단순 노동력을 활용한 조립공정이 위주가 되었지만, 일본의 산업재배치와도 맞물리며 혁신능력을 강화하고 점차 기술사다리의 윗단계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환율제도의 변화 또한 중국으로부터의 압력을 강화시켰다. 1981년 이래 중국정부는 '공정환율(공식환율)'과 시장수급을 반영한 ‘조절환율(시장환율)’의 이중적 환율제도를 운영해왔다. 공정환율은 조절환율에 비해 훨씬 낮았는데, 이는 외화자원의 제약조건 속에서 대외채무로 인한 지급부담을 줄이기 위한 정책으로 생각된다. 그러던 와중, 1994년 들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표방한 중국 정부는 공정환율과 조절환율을 일원화하고 관리변동환율제를 도입했다. 공정환율을 달러당 8.7위안으로 33% 절하해 조절환율과 같아지게 조치했다. 이와 같은 ‘평가절하’ 조치는 중국의 수출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지역 간 가격 경쟁을 심화시켰다.

중국의 도전은 무엇보다 비슷한 방식의 ‘따라잡기’ 성장을 겪어온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 ‘따라잡기’와 ‘도망가기’의 동학은 동시기의 과잉유동성을 만나 투자붐을 가속시켰다. 미래 수요에 대한 비현실적인 기대에 기초해, 과잉 생산능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가령 일시적으로 나타난 D-RAM 공급 부족을 바탕으로 한국의 재벌들은 1994년과 1995년에 걸쳐 막대한 규모의 투자를 감행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공급부족이 사라지며 공급과잉이 나타나게 된다. 비슷하게 1997년 초 타이에서는 부동산 거품이 지나간 자리에 365,000개의 아파트 공실이 남았다. 동아시아의 수출주의적 생산의 구조는 이러한 공급과잉을 지역적 소비를 통해 돌파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세계 GDP 2위의 일본은 고령화와 불황이 장기화되며 저축성향이 더욱 강해져있었고, 중국은 거대한 시장 잠재력이 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1인당 소득이 너무 적었다. 수출경제를 보충하는 내수경제의 역동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징후가 보였지만, 이는 수출이 전면적 침체기에 접어들지 않는 이상은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다른 한편, 일본의 버블 붕괴는 이미 80년대에 진전된 글로벌 금융시장의 자유화, 지역금융허브로서 도쿄와 홍콩의 부상과 더불어 1990년대 과잉유동성을 발생시킨 배경이 되었다. 1989년 일본의 버블이 붕괴한 뒤, 회수불능채권이 늘어나고 매력 적인 투자처는 점점 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당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실시한 초저금리 정책은 의도와 달리 해외 포트폴리오 투자를 더욱 활성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95년 ‘역플라자’ 합의와 더불어 나타난 변화는 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역플라자 합의에 따른 ‘1985년 플라자 합의’는 일본에 통상압력을 가해 경상수지 균형을 맞추고자 한 것이었지만, 계속된 달러 약세에도 경상수지 적자가 개선되지 않는다. 1995년 재선을 준비하던 클린턴 정부는 ‘강한 달러’ 정책 을 추진하고, 자본수지 흑자를 통해 경상수지 적자를 만회하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이에 1995년 1달러=80엔 수준이던 엔화 가치는 1996년 1달러=130엔 수준까지 절하되게 된다.

일본의 초저금리와 추가적인 절하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투자방식을 유행하게 만들었다. 제로에 가까운 금리로 빌리고, 갚을 때는 더 값싸게 갚을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를 빌려다 고성장하는 신흥국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다. 이로서 일본의 버블은 다른 아시아 국가들로 ‘수출’되었고,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값싼 단기신용에 대한 의존도를 더욱 높여갔다. 만기가 짧다고는 하나 대부분 차환이 가능했기 때문에 각종 장기 프로젝트에 끌어다 쓰는 것도 당시로서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간주되었다. 그동안 국가의 통제·규제 하에 놓여있었던 금융기관들은 금융자유화 과정에서 해외신용에 기반해 빠르게 몸집 불리기에 나섰지만, 이를 관리할 만한 경험이 부재했다. 당국의 비대칭적인 규제가 발생시킨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위험 한 투자를 벌인 한국의 종합금융회사, 태국의 파이넌스 컴퍼니, 일본의 주택전문금융회사 등 비은행기관들은 위기에 가장 취약한 부문을 형성했다. 각국은 경기과열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적 개입들을 취하게 되고, 이는 경기순환적 요인과 결합하여 자산가격의 버블을 붕괴시킨다. 불과 1년이 지나지 않아 1996년부터 곳곳에서 버블이 붕괴하며 재고투자와 부실채권이 증가 했지만, 현금흐름이 막힌 기관들은 단기자금 차입을 증가시켰다.

해외투자자들이 매도 포지션으로 돌아서게 되면, 더이상 경상수지 적자를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보전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때마침 일본 은행들이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를 받게 되면서, 1998년 3월까지 10%의 자기자본비율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일본은행들의 신용이 회수되면서 인근 지역의 유동성이 고갈되는 한편, 이러한 움직임 자체가 엔화가치의 상승을 부추며 대외채무부담을 더욱 증가시켰다. 신인도 하락과 자본이탈이 악순환을 이루게 되면, 고정환율제도가 붕괴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짐으로서 투기적 공격이 촉발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이처럼 중국의 부상, 일본 자산시장 버블의 수출, 엔화가치 절하, 지역적 신용경색은 수출주의 경제가 유지되도록 했던 생산과 금융 질서의 일관성을 파괴시킨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