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록

제목[1992.08.24] 한중수교


설명▶배경 국제적 배경으로 1989년 12월〈미·소간의 몰타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이 선언된 것을 들 수 있고, 동북아에서는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이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수교의 성공이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한·중간의 직접적 교섭이 시작된 것은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였다. 5월 5일 춘천 비행장에 착륙한 피납 항공기와 여객의 반환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에서 한·중 양 국가는 처음으로 직접 교섭에 임하였고 양해각서에 서명하여 묵시적으로 한국정부를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내용 한·중간의 관계 정상화의 배경에는 양국가간의 증가하는 경제적 교역이 영향을 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중 양국가의 무역량은 31억 달러에 달하였다. 한국은 1988년 4월 이후 산동성과 요녕성에 민간 경제조사단을 파견하고 민간 무역사무소 설치에 합의했다. 1990년 9월에는 한국의 무역진흥공사와 중국의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사이에 무역관계 개설에 합의했고, 1991년에는 한·중 양국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하였다. 중국은 전통적 우방인 북한을 의식하여 한국과 거리를 유지하였고 1991년 9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한 이후에야 외무장관 회담에 응하였지만 이미 5월부터 중국은 북한의 UN가입을 설득하였고 한국을 승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한국은 1991년 10월과 11월에 중국에 수교협상을 제의하였으나 유보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1991년 12월에 남북한 사이에 열린 〈제5차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12월 31일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는 남북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결국, 중국은 1992년 4월에 이상옥 외무장관이 북경 ESCAP 총회 참석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한·중외무장관 회담〉을 통하여 수교협상을 개시하였다. 이후 실무진의 교섭과정을 거쳐 1992년 8월 23일〈제4차 한·중외무장관 회담〉에서 수교에 관한 모든 조건이 타결되고 다음날 24일〈한·중수교공동성명〉이 채택되어 최종 수교가 이루어졌다. 수교협상 막판에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측으로부터의 양해를 얻어내며 북한을 달래는 외교적 제스쳐를 취했다. 한편, 한국은 수교협상과정에서 중국이 요구한 사항, 즉 대만과의 관계청산요구에 따라서 오랜 외교적 유대를 지녔던 우방국가였던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중수교로 말미암아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장기적으로 한·중간의 협력과 공동번영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대북영향력을 가진 강대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높이게 되었고 한중간의 민간경제 교류와 교역의 획기적 증대를 통하여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를 확대하게 되었다.


날짜1992.08.24


참고자원국가기록원


참고자원URL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


연표구분노태우 정권


관련인물조직KC-O-00005


식별번호KC-Y-0097


제목[1992.08.24] 한중수교


설명▶배경 국제적 배경으로 1989년 12월〈미·소간의 몰타정상회담〉에서 냉전 종식이 선언된 것을 들 수 있고, 동북아에서는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쵸프가 중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이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수교의 성공이 중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한·중간의 직접적 교섭이 시작된 것은 1983년 5월 중국 민항기 납치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였다. 5월 5일 춘천 비행장에 착륙한 피납 항공기와 여객의 반환을 위한 양해각서 체결에서 한·중 양 국가는 처음으로 직접 교섭에 임하였고 양해각서에 서명하여 묵시적으로 한국정부를 인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내용 한·중간의 관계 정상화의 배경에는 양국가간의 증가하는 경제적 교역이 영향을 주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중 양국가의 무역량은 31억 달러에 달하였다. 한국은 1988년 4월 이후 산동성과 요녕성에 민간 경제조사단을 파견하고 민간 무역사무소 설치에 합의했다. 1990년 9월에는 한국의 무역진흥공사와 중국의 국제무역촉진위원회 사이에 무역관계 개설에 합의했고, 1991년에는 한·중 양국에 무역대표부를 개설하였다. 중국은 전통적 우방인 북한을 의식하여 한국과 거리를 유지하였고 1991년 9월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한 이후에야 외무장관 회담에 응하였지만 이미 5월부터 중국은 북한의 UN가입을 설득하였고 한국을 승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한국은 1991년 10월과 11월에 중국에 수교협상을 제의하였으나 유보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1991년 12월에 남북한 사이에 열린 〈제5차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남북한 기본합의서〉가 채택되고 12월 31일 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는 남북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결국, 중국은 1992년 4월에 이상옥 외무장관이 북경 ESCAP 총회 참석차 중국을 방문했을 때〈한·중외무장관 회담〉을 통하여 수교협상을 개시하였다. 이후 실무진의 교섭과정을 거쳐 1992년 8월 23일〈제4차 한·중외무장관 회담〉에서 수교에 관한 모든 조건이 타결되고 다음날 24일〈한·중수교공동성명〉이 채택되어 최종 수교가 이루어졌다. 수교협상 막판에 중국의 전기침 외교부장은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측으로부터의 양해를 얻어내며 북한을 달래는 외교적 제스쳐를 취했다. 한편, 한국은 수교협상과정에서 중국이 요구한 사항, 즉 대만과의 관계청산요구에 따라서 오랜 외교적 유대를 지녔던 우방국가였던 대만과 단교를 하게 되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했다. 한·중수교로 말미암아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장기적으로 한·중간의 협력과 공동번영의 시대를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대북영향력을 가진 강대국 중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안정성을 높이게 되었고 한중간의 민간경제 교류와 교역의 획기적 증대를 통하여 경제적 상호의존관계를 확대하게 되었다.


날짜1992.08.24


자원유형연표


참고자원국가기록원


참고자원URL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2919


연표구분노태우 정권


관련인물조직KC-O-00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