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록

제목김대중


직급대통령 후보


바이오그래피김대중은 1924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1944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해운 사업과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제4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연달아 낙선했다.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에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곧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63년, 고향인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1964년, 국회 본회의에서 같은 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5시간 19분 동안의 필리버스터로 주목 받았고, 이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무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자에 지목되었다. 1971년, 대선 후보로 향토예비군제 폐지, 4대국 평화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남북대화, 노사위원회 구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며 539만 표를 득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이후 군부 정권의 납치, 가택연금, 투옥, 사형선고, 정치활동 금지 등의 탄압을 받으며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면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야당 간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낙선하게 된다. 1992년 열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낙선하자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 상임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으며 이후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다.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IMF 구제금융 협상 등 경제 위기가 찾아온 상황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자 구도로 치뤄진 대선에서 승리,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당선 이후 IMF 외환위기 사태를 맞이한 상황에서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 강도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부채 축소에 나섰다. 그뿐 아니라 IT 벤처기업 육성, 문화컨텐츠 산업 투자 등을 통해 새로운 산업 부문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3년 만에 IMF의 차관을 전액 상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 활성화와 내수진작을 목표로 신용카드 규제를 풀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여 훗날 가계 부채 문제를 심화시키고 부동산 투기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햇볕정책으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홈페이지http://www.pa.go.kr/online_contents/president/president15.jsp


참고자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식별번호KC-O-00002


제목김대중


자원유형인물


직급대통령 후보


바이오그래피김대중은 1924년, 전남 신안에서 태어났다. 1944년, 목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해운 사업과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55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제4대,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연달아 낙선했다. 1961년 5월 14일 강원도 인제에서 치뤄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곧 5.16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의원 활동을 하지 못했다. 1963년, 고향인 목포에서 제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1964년, 국회 본회의에서 같은 당 김준연 의원의 구속을 막기 위한 5시간 19분 동안의 필리버스터로 주목 받았고, 이후 신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정무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1970년, 신민당 내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서 김영삼,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 돌풍을 일으키며 대통령 후보자에 지목되었다. 1971년, 대선 후보로 향토예비군제 폐지, 4대국 평화보장, 지방자치제 실시, 남북대화, 노사위원회 구성 등을 공약으로 내걸며 539만 표를 득표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634만 표를 얻은 박정희에게 패배했다. 이후 군부 정권의 납치, 가택연금, 투옥, 사형선고, 정치활동 금지 등의 탄압을 받으며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대통령 직선제가 다시 실시되면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야당 간의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또 다시 낙선하게 된다. 1992년 열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다시 낙선하자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 아시아태평양 민주지도자회의 상임공동의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으며 이후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했다. 기아자동차 부도 사태, IMF 구제금융 협상 등 경제 위기가 찾아온 상황에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3자 구도로 치뤄진 대선에서 승리, 대한민국의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당선 이후 IMF 외환위기 사태를 맞이한 상황에서 금융, 기업, 노동, 공공 4대 분야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고 강도높은 기업 구조조정과 부채 축소에 나섰다. 그뿐 아니라 IT 벤처기업 육성, 문화컨텐츠 산업 투자 등을 통해 새로운 산업 부문을 발전시켰다. 그 결과 3년 만에 IMF의 차관을 전액 상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 활성화와 내수진작을 목표로 신용카드 규제를 풀고, 부동산 규제를 완화하여 훗날 가계 부채 문제를 심화시키고 부동산 투기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고 햇볕정책으로 남북 관계를 진전시킨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9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홈페이지http://www.pa.go.kr/online_contents/president/president15.jsp


참고자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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