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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김영삼


사전유형인물조직


직급대통령


바이오그래피 김영삼은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경남중학교를 졸업하고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한국전쟁 당시 학도의용군에 입대, 정훈병으로 근무하다가 당시 국회 부의장이던 장택상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정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장택상이 국무총리에 취임하면서 국무총리실 인사담당 비서관이 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거제군에 출마, 만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이 되었다. 1954년, 이승만의 3선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이에 항의하여 자유당을 탈당, 민주당에 입당했다. 이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야당의 청년 지도자로 활약하게 된다.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정에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제3공화국 내내 신민당의 원내총무와 대변인을 거치면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다가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69년,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대선 출마를 선언하지만 경선에서 김대중에게 패배했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자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걸고 정치권의 반유신 투쟁을 주도했다. 1979년, YH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 당사 농성에 돌입하자 이를 지지하며 공권력과 충돌했다. 그뿐 아니라 타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를 문제 삼아 의원직을 제명하자,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김영삼 제명 반대와 유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를 요구하는 부마민중항쟁이 일어났다.  10.26 사건으로 유신 체제가 무너지자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로 정치 활동에 나서지만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으로 가택연금 당하고 곧 정치활동 규제에 묶이게 된다. 1983년, 23일 간의 단식농성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1986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1천만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자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노태우, 김대중과의 3자 구도에서 2위로 낙선했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을 선언, 민주자유당을 창당하며 보수 여당 정치인으로 돌변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당선, 1대통령에 취임하며 문민 정부를 열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 중 금융실명제(1993년)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통 명문화 등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 철거하였고, 국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그러나 1997년,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등 재벌 기업들이 연달아 부도를 겪으며 경제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외환 위기 소식은 사회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IMF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 혼선이 빚어졌으며, 이는 고스란히 김영삼 정권의 책임으로 비판 받았다.  대통령 퇴임 이후 여러 사회활동에 참여하다가 2015년 급성 심부점과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997년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다. 2015년 11월 22일 0시 22분 서울대학교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서거하였다.[5][6] 서울대학교병원 측은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후 기자회견에서 급성 패혈증과 심부전증이 사인이라고 밝혔다.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기간의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홈페이지http://www.pa.go.kr/online_contents/president/president14.jsp


참고자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