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기록

제목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한국, IMF로 가다


설명2003년 3월 30일 (일) / 제 67 회 ▶ 한국, IMF로 가다 / 연출 : 조준묵 99년 초, 환란 위기를 초래한 원인과 주범을 밝히는 청문회가 열렸 다. 결국, 당시 경제 책임자인 강경식과 김인호가 직무유기 및 직권남 용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제청문회는 일단락되고... 과연, 그들이 내린  정책적 판단엔 무슨 문제가 있었으며, 97년 한 국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97년 세계경제, 그리고 한국 “태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바람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 시아, 싱카폴 등 인접국가를 태풍처럼 휩쓸고.. 빠르게 북상해 결 국 한국 강타!” 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는 동남아 외환위기로 국제 금융시장이 불 안해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주요 수출국인 동남아 경 기 침체 여파가 곧 한국에 악영향을 미칠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 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은 우리나라에 투자되었던 외국인 투자 자금의 해외 이탈을 가속화 했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의 신용 도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인이 된다. 그 가운데 10월 23일 홍콩증시 폭락은 한국 대외 금융상황에 직격탄을 날리고 마 는데... IMF 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제자본 “IMF 구제금융은 외환유동성의 위기에서 시작했지만, 그 본질은 급변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뒤떨어져 비효율의 낡은 경제운용시 스템에 안존하다가 맞은 ‘준비된 벼락’이였다.” 세계경제 11위를 자랑하던 한국경제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 음과 동시에 경제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50여년간 수출 드 라이브 정책으로 고도성장실현에 성공, 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후 처음으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하는 기록을 세운 한 국경제였건만, 50년 압축성장을 한순간에 무효로 돌려버린 거품 의 그늘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인가? “한국의 거시경제상황은 튼튼했다. 물론 구조적인 문제가 있긴 했 지만, 그것이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불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IMF 조차 몰랐던 한국의 위기! 97년 10월 한국에 파견된 IMF 실사 단,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조차도 한국이 동남아시아와 같은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 지는 상황에서 아시아 금융위기가 펜더멘탈이 든든한 한국마저 강 타하리라고는 IMF 조차도 미리 예견치 못했던 재앙이었다. “IMF 뒤에는 미국의 배후조정이 있었다!” 휴버트 나이스 단장을 주축으로 한 IMF 협상단은 한국의 상황이 절대절명의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그들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협상을 진행한다. 그러나 IMF 협상단의 보고를 받 은 미 재무부는 IMF가 한국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우 려와 함께 위기를 초래한 경제적인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 엄격한 요구조건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고, 美 재무부 데이비드 립튼 차 관을 한국에 급파해 IMF 협상단과 같은 숙소에 머물게 하면서 IMF 협상단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며 협상을 진행하도록 한다. 결국 최종 협상시에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IMF의 요구조건은 점 점 더 강해지고, 한국측에게 아주 중요했던 상당수의 양보조건이 캉드쉬 IMF 총재의 요구로 철회되고 만다. “IMF 협상 타결 이후 더욱 흔들리는 외환시장.. IMF 조차 당황하 고 충격을 받았다” 1997년 12월 3일.. 총 5백 50억 달러의 긴급자금이 지원 합의되면 서 IMF와의 최종 협상이 체결된다. 그러나 협상 타결 이후 외환은 더 급속도로 빠지고, 환율은 안정은커녕 더욱 요동치고 한국경제 는 국가 부도 위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린다. 경제위기에 날벼락이란 없다!! 한국경제는 무엇이 문제였는 가? “결국 YS 정부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정부에 의한 감시도 작동 하지 않고, 금융기관에 의한 감시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재벌 들의 어떤 의사결정에 대해서 누구도 감시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만들 어졌습니다.” 97년 1월 23일, 국내 14위 규모의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된다. 부실 대출 규모 5조원! 이른바 ‘무분별한 차입경영’,‘로비경영’의 전형적 인 사례... 무모한 산업정책과 정경유착의 실상,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의 국정농단, 그 폐해 끝에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으로 이어 진 한보사건은 국정의 중심을 흔들고 정부를 무기력에 빠트린다. 그 뒤 꼬리를 이은 대기업의 부도는 국가경제의 위험을 알리는 분 명한 암시가 되는데... ‘국민기업’ 기아가 부도나고 그 처리에 시간을 끌기까지 누구 하나 국가경제의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 모두의 ‘무지와 무 능’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것일까?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금융기관마저 함께 부실해지는 것은 자명 한 결과였다. 에필로그 - 뒤늦은 깨달음 문민정부 시절, ‘정부-재벌-은행’의 삼각고리가 마련한 경제의 악 순환은 시장 자체를 크게 왜곡시켰다. 게다가 세계화의 구호는 정 경유착과 관치금융의 그늘아래서 재벌에게 국제경쟁력을 높인다 는 명분으로 대폭적인 자율성을 부여했다. 결국 철저한 재벌의 구 조 개혁없이, 또 신자유주의라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제대로 직 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경제가 제대로 작동되기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착각이였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 이 세계적 기대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세계화 흐 름에서 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산자MBC


날짜2003-03-30


기록유형동영상


기록형태다큐멘터리


주제IMF협상


연관링크https://youtu.be/fJLt8YVIY5A


태그보기

식별번호KC-R-02132


제목이제는 말할 수 있다 - 한국, IMF로 가다


설명2003년 3월 30일 (일) / 제 67 회 ▶ 한국, IMF로 가다 / 연출 : 조준묵 99년 초, 환란 위기를 초래한 원인과 주범을 밝히는 청문회가 열렸 다. 결국, 당시 경제 책임자인 강경식과 김인호가 직무유기 및 직권남 용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경제청문회는 일단락되고... 과연, 그들이 내린  정책적 판단엔 무슨 문제가 있었으며, 97년 한 국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97년 세계경제, 그리고 한국 “태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바람은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 시아, 싱카폴 등 인접국가를 태풍처럼 휩쓸고.. 빠르게 북상해 결 국 한국 강타!” 아시아 전역으로 파급되는 동남아 외환위기로 국제 금융시장이 불 안해지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의 주요 수출국인 동남아 경 기 침체 여파가 곧 한국에 악영향을 미칠것이라고 예상한다. 이러 한 국제 금융시장의 불안은 우리나라에 투자되었던 외국인 투자 자금의 해외 이탈을 가속화 했고,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의 신용 도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요인이 된다. 그 가운데 10월 23일 홍콩증시 폭락은 한국 대외 금융상황에 직격탄을 날리고 마 는데... IMF 와 신자유주의 시대의 국제자본 “IMF 구제금융은 외환유동성의 위기에서 시작했지만, 그 본질은 급변하는 세계경제의 흐름에 뒤떨어져 비효율의 낡은 경제운용시 스템에 안존하다가 맞은 ‘준비된 벼락’이였다.” 세계경제 11위를 자랑하던 한국경제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 음과 동시에 경제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지난 50여년간 수출 드 라이브 정책으로 고도성장실현에 성공, 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후 처음으로 저개발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 성장하는 기록을 세운 한 국경제였건만, 50년 압축성장을 한순간에 무효로 돌려버린 거품 의 그늘은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인가? “한국의 거시경제상황은 튼튼했다. 물론 구조적인 문제가 있긴 했 지만, 그것이 이렇게 심각한 위기를 불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다” IMF 조차 몰랐던 한국의 위기! 97년 10월 한국에 파견된 IMF 실사 단, 그들이 작성한 보고서에서 조차도 한국이 동남아시아와 같은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금융시장이 혼란스러워 지는 상황에서 아시아 금융위기가 펜더멘탈이 든든한 한국마저 강 타하리라고는 IMF 조차도 미리 예견치 못했던 재앙이었다. “IMF 뒤에는 미국의 배후조정이 있었다!” 휴버트 나이스 단장을 주축으로 한 IMF 협상단은 한국의 상황이 절대절명의 상황인 것을 파악하고 그들이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협상을 진행한다. 그러나 IMF 협상단의 보고를 받 은 미 재무부는 IMF가 한국위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우 려와 함께 위기를 초래한 경제적인 상황이 반복되지 않을 엄격한 요구조건이 필요하다라고 생각하고, 美 재무부 데이비드 립튼 차 관을 한국에 급파해 IMF 협상단과 같은 숙소에 머물게 하면서 IMF 협상단에 엄청난 압력을 가하며 협상을 진행하도록 한다. 결국 최종 협상시에는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IMF의 요구조건은 점 점 더 강해지고, 한국측에게 아주 중요했던 상당수의 양보조건이 캉드쉬 IMF 총재의 요구로 철회되고 만다. “IMF 협상 타결 이후 더욱 흔들리는 외환시장.. IMF 조차 당황하 고 충격을 받았다” 1997년 12월 3일.. 총 5백 50억 달러의 긴급자금이 지원 합의되면 서 IMF와의 최종 협상이 체결된다. 그러나 협상 타결 이후 외환은 더 급속도로 빠지고, 환율은 안정은커녕 더욱 요동치고 한국경제 는 국가 부도 위기 직전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린다. 경제위기에 날벼락이란 없다!! 한국경제는 무엇이 문제였는 가? “결국 YS 정부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은 정부에 의한 감시도 작동 하지 않고, 금융기관에 의한 감시도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재벌 들의 어떤 의사결정에 대해서 누구도 감시하지 않는 공백상태가 만들 어졌습니다.” 97년 1월 23일, 국내 14위 규모의 한보그룹이 부도 처리된다. 부실 대출 규모 5조원! 이른바 ‘무분별한 차입경영’,‘로비경영’의 전형적 인 사례... 무모한 산업정책과 정경유착의 실상, 대통령 친인척과 측근의 국정농단, 그 폐해 끝에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속으로 이어 진 한보사건은 국정의 중심을 흔들고 정부를 무기력에 빠트린다. 그 뒤 꼬리를 이은 대기업의 부도는 국가경제의 위험을 알리는 분 명한 암시가 되는데... ‘국민기업’ 기아가 부도나고 그 처리에 시간을 끌기까지 누구 하나 국가경제의 위기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 모두의 ‘무지와 무 능’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것일까? 대기업의 잇단 부도로 금융기관마저 함께 부실해지는 것은 자명 한 결과였다. 에필로그 - 뒤늦은 깨달음 문민정부 시절, ‘정부-재벌-은행’의 삼각고리가 마련한 경제의 악 순환은 시장 자체를 크게 왜곡시켰다. 게다가 세계화의 구호는 정 경유착과 관치금융의 그늘아래서 재벌에게 국제경쟁력을 높인다 는 명분으로 대폭적인 자율성을 부여했다. 결국 철저한 재벌의 구 조 개혁없이, 또 신자유주의라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을 제대로 직 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경제가 제대로 작동되기 바라는 것은 우리 모두의 착각이였는지 모른다. 결국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 이 세계적 기대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세계화 흐 름에서 뒤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생산자MBC


날짜2003-03-30


포맷42분 33초


언어한국어


출처youtube


연관링크https://youtu.be/fJLt8YVIY5A


기록유형동영상


기록형태다큐멘터리


대주제IMF협상


소주제협상이전


자원유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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