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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노무현


사전유형인물조직


소속새정치국민회의


바이오그래피노무현은 1946년 경상남도 김해에서 태어났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1975년 독학으로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1년을 재직하다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여러 인권 관련 사건을 변호했다. 1988년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의 공천으로 제 13대 총선에 출마하여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었고,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국민경선제에서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제16대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초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무렵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이 정한 중립의무 및 헌법 위반을 시유로 야당에 국회로부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 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이후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은 여론의 역풍에 휩싸여 제17대 총선에서 참패하였고 얼마 후 헌법재판소에서 소추안을 기각하며 노무현은 다시 대통령 직무에 복귀하였다. 주요 업적으로는 권력층에 만연해 있던 권위주의와 정경유착을 타파하고 기존 보수 정권이 하지 못했던 각종 개혁을 시행한 것이 꼽힌다. 상속증여세의 포괄주의를 도입해 재벌 총수들의 탈세 여지를 좁힌 것, 재벌개혁 중 하나인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 시행, 재벌기업들 사이의 담합에 대한 적발과 처벌도 강화한 것 등이다. 대통령이 자기 진영의 불법대선자금을 앞장서 밝힘으로써 정경유착을 완화한 것도 높게 평가받는다. 임기 중 경제성장률은 4.42%로 OECD 평균성장률을 항상 상회했으며 임기 내내 부동산 시장과 증시가 활황을 보였는데, 이는 이후 이명박 정부의 2.9%와 박근혜 정부의 2.8%를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 근절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IMF 사태 이후 악화된 소득분배가 노무현 정권에서도 그다지 개선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 게다가 반미적 입장, 편협한 국수주의, 친북적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모순으로 국제사회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이런 서민 생활과 직결되는 분야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외교·안보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여론 조사가 정례화 된 제6공화국 이래 노태우와 임기 평균 국정 지지율 최하위를 다툴 정도로 대중적인 지지가 부족했던 대통령으로,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같은 유행어가 나올 정도로 재임 시 원성을 많이 듣고 인기가 없었다.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퇴임 후 고향 김해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였다. 2009년 검찰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노무현의 측근 세력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게 되었고, 노무현과 개인적 친분이 있던 박연차로부터 노무현 일가가 금전을 수수했다는 포괄적 뇌물죄 혐의를 받아 조사를 받았으며,노무현 또한 검찰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아내가 받았다는 노무현의 주장과는 달리, 박연차는 검찰 조사에서 노무현이 직접 전화를 걸어 자녀들의 집 장만을 위한 100만달러를 요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고, 비서관을 통해 요청을 받고 차명계좌에서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조카사위 연철호가 동업하는 기업에 500만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밝혀졌다. 이같은 뇌물 수수 직접 개입 의혹이 수면으로 부상하면서 궁지에 몰리게 되자, 노무현은 그 해 5월 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하였다. 양산부산대학교병원에서는 기자회견을 통해 두부 외상과 다발성 골절 등을 사망 이유로 결론내렸다. 노무현이 사망하면서 법무부는 노무현의 뇌물 수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를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시켰다. 사후 1주일 동안 봉하마을에는 전국에서 400만 명의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노무현의 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홈페이지http://www.pa.go.kr/online_contents/president/president16.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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