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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어쌍용그룹


사전유형인물조직


바이오그래피1939년 김성곤이 대구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를 모태로 하며, 금성방직이 주축 사업이어서 '금성재벌'이라 불렀지만, 영월군 쌍룡리에 시멘트 공장을 세우면서 쌍용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제4대 민의원이기도 했던 김성곤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에 대한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3선 국회의원과 쌍용그룹 총수, 사학재단 이사장, 언론사 사주 등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쌍용그룹 역시 김성곤의 아래 크게 성장했다. 1975년, 김성곤이 사망한 이후 장남 김석원이 경영권을 승계하여 자동차와 중화학 공업 등으로 사업을 크게 확장했다. 그러나 무리한 기업 확장은 부채를 불러왔고, 특히 쌍용자동차에서 적자가 누적되면서 그룹 전체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용그룹은 자동차 사업에 대한 공격적 투자에 나섰고, 대부분의 자산을 은행 담보로 잡으면서 4년 간 무려 4조원에 달하는 금액을 자동차 사업에 투입했다. 자동차 사업에 대한 무모한 투자로 그룹 전체의 상황이 기울자, 김석원은 뒤늦게 쌍용자동차 매각으로 활로를 찾으려 했으나 외환위기로 인해 매각이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그룹의 부채는 크게 늘어났다. 결국 1998년 1월 쌍용자동차는 기대보다 낮은 조건으로 대우그룹에 매각되었다. 쌍용자동차 매각 이후 그룹 계열사들이 떠안게 된 부채는 2조원에 달했고, 쌍용증권, 쌍용정유, 쌍용중공업ㅡ 쌍용화재 등 핵심 계열자들이 연달아 매각되면서 쌍용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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