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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화와 고성장을 이루었던 개발국가 모델은 7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대책부터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한 경제정책과 변화의 흐름을 오형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함께합니다.  

1979년 4월 17일 모든 주요 일간지는 1면 머리기사로 당시 경제기획원장 신현확의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보도했습니다. 당시 매일경제 1면 머리기사는 「25개 생필품 특별관리」였고 그 바로 밑에는 “영세서민 생계대책으로”라고 쓰여 있는 걸 봤을 때, 이 대책은 서민들을 위해 물가 관리에 주력하려는 성격이 강한 것을 알 수 있죠. 당시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이하 <대책>)은 지금까지도 경제 정책 운용의 전반적인 특성을 반전시킨 중대한 전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가 안정에 정부가 매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것인데, 이 <대책>은 왜 지금까지도 중요하게 지적될까요? 적어도 우리 상식에서 물가 폭등을 선호하거나 조장하는 정부는 없을 텐데, 당시에 물가 안정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대책 발표는 어떤 점에서 중대한 전환점으로 언급될까요?

1978년, 보건사회부 장관이었던 신현확이 박정희에게 업무 보고를 하고 있는 모습.
신현확은 이듬 해 경제기획원장이 되어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을 이끈다.

경제안정화종합대책 관련 매일경제 1면 기사

당시 <대책>의 핵심 단어인 ‘경제 안정’은 ‘경제 성장’과 대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적 수준의 경제 운용에서 경제 ‘성장’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실업’과 경제 ‘안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낮은 물가’는 보통 ‘두 마리 토끼’에 비유되는데, 다시 말해 둘 다 추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따라서 보통 어느 한쪽을 더 주력할 수밖에 없는데, 전통적으로 1960년대 이래 한국 국가는 경제 ‘성장’에 더 매진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물가 상승’은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성장’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작용 정도로 여겨졌죠. 아래 글은 1960-70년대 이 같은 성장 일변도 경제 정책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1960년대 이후의 경제개발의 과정, 수출입국론의 확산, 1970년대 이후 100억 달러 수출, 1인당 GNP 1,000달러 달성, 중화학공업화 등 외형적 성장론이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장’은 하나의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경제성장이 급속도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지만, ‘성장’이라고 하는 명제를 건드리지 않는 한도 내에서 처방전이 나올 뿐이었다. [박태균. 2004. 「1970, 80년대 경제정책 주체의 변화와 새로운 경제 담론」, 유철규 편,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43쪽]

다만 ‘성장’이라는 목표가 한국이라는 하나의 국가가 추구한다고 해서 달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자본주의는 내수보다는 수출 시장을 통해서 성장했기 때문에, 주요 선진 자본주의 지역의 경기에도 큰 영향을 받았죠. 2차 대전 이후 세계 자본주의는 1950-60년대 이른바 ‘황금기’를 거치고, 1970년대가 되자 전반적인 불황에 빠져듭니다. 1970년대 대불황의 원인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가 대단히 컸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아래와 같은 지적은 1970년대 대불황의 여파를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입니다.

1974년 여름 공황(crash)이 시작되었다. 선진국의 공업 생산은 1974년 7월과 1975년 4월 사이에 10% 감소했다. 1975년 상반기에 선진국의 생산은 전년도에 비해 3.5% 감소했으며 국제 무역량도 13% 감소했다. 1975년 상반기에 선진국의 생산은 전년도에 비해 3.5% 감소했으며 국제 무역량도 13% 감소했다. 1975년 전체를 통해 생산은 1973년보다 조금 감소했다(미국은 1.5% 감소, 일본은 약 1.5% 상승). 전후 최악의 2년은 이전에는 1957-58년이었고, 1958년에는 1956년에 비해 생산이 4.5% 증가했는데, 1974년의 공황은 1929년 이래 단연코 최대 규모였다. [필립 암스트롱 · 앤드류 글린 · 존 해리슨. 1993. 『1945년 이후의 자본주의』, 김수행 옮김, 동아출판사. 330쪽]

1970년대 이후의 전 세계적 불황은 한국이 향후 전망을 수정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습니다. 한편으로, 한국은 여태까지 이룩했던 것만큼의 ‘성장’을 지속될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을 갖게 되었고, 동시에 ‘물가 인상’이 단순히 ‘성장’의 부수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칫하면 지금까지 이뤄놓은 ‘성장’을 근본적으로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이 형성됩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의 성장 일변도 정책만으로는 한국 자본주의를 계속 운영할 수 없고 ‘물가 안정’에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죠.

1970년대 중반의 물가 안정 정책은 주로 행정 규제로 나타났습니다. ‘물가 인상 단속반’이 상점들을 순회하면서 가격 인상을 제지하는 식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같은 방식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특정 해의 물가 인상 억제는 그 다음 해에 물가 폭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아래의 지문은 행정 규제 방식의 물가 안정 정책이 가졌던 근본적인 난점을 잘 보여줍니다.

제1차 석유파동을 겪은 한국정부는 1975년 말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물가의 행정규제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물가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물가안정은 근본적인 인플레이션이나 통화팽창의 문제점을 해소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1973년의 예--당시 소비자 물가증가율이 3.2%밖에 되지 않았다--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물가 압력을 단순히 잠재화시키는 것이었다. 1973년의 물가안정은 1974년의 42.1%에 이르는 도매물가 상승률을 가져왔고, 1975년 이후 1978년에 이르기까지 물가안정 및 건설 및 부동산 투기를 포함한 경기과열은 동 기간 중 거의 모든 물자에 있어서 이중가격의 형성과 ‘프리미엄의 시대’를 야기하였다. [박태균. 2004. 「1970, 80년대 경제정책 주체의 변화와 새로운 경제 담론」, 유철규 편,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읽는책. 44쪽]

1979년 2월,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가 주최한 긴급소비자대회에서 경제기획원 차관보가 물가안정을 위한 정부 대책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이 같은 문제로 인해서, 한국 정부는 1970년대 후반에는 더 근본적인 물가 안정 대책에 주력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정책이 바로 <대책>이었죠. <대책>의 핵심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됩니다.

1. 안정 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당면대책과 함께 제도 및 경제운용방식 등에 관한 구조적 개선과 근원적 대책의 수립추진
2. 물가구조 개편과정에서의 서민생활 불안정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식료품 등 생필품의 수급 원활화와 가격안정에 우선
3. 안정을 위한 투자조달 등의 대책은 우리경제의 장기적 발전잠재력을 배양하고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개
4. 시책의 중점을 경제안정에 두고 안정을 위하여 성장, 수출, 투자 등 각종시책을 신축적으로 운용하고 시책 상호간의 조화를 유지
<매일경제> 1979.04.17. 2면

1번은 정부가 핵심적으로 추진하던 ‘성장’ 일변도의 정책을 추구할 수 없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따라서 <대책>의 주요 내용은 (1)추세성장을 11%에서 9%로 하향 조정, (2)통화 긴축의 견지, (3)재정수지 흑자기조 견지, (4)수입확대를 통한 물가안정 도모 등이었습니다. 즉, 1번에서 언급되는 ‘구조적 개선과 근원적 대책’은 한국 정부가 이전까지 유지되던 ‘고도 성장’만을 추구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2번은 물가불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데, 특히 서민 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생필품 수급에 주력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합니다. 3번은 더 이상 ‘투자량 증대’가 ‘수출량 증대’로 이어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향후에는 ‘발전 잠재력’이나 ‘경쟁력’과 같은 기술 증진을 도모해야 한다는 인식을 나타냅니다.

이 네 가지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항목은 4입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당연히 경제 운용의 중점이 ‘성장, 수출, 투자’에 있었으나 이때부터는 그 중점을 ‘안정’에 두고 나머지 정책들을 안정을 위하여 ‘신축적으로 운용’한다고 명시하기 때문입니다. 1979년 4월 17일 <동아일보> 1면의 머리기사는 「수출, 중화학보다 안정우선」이었는데요.. 어쩌면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가 <대책>의 핵심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대책>은 그 동안 수출이나 중화학공업화에 매진해온 국가 관료들의 큰 저항에 부딪혔는데, 여기서 구심점은 당시 대통령 박정희였다고 합니다. 결국 당시 대통령조차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 정책이 경제 정책의 주무 부처였던 경제기획원에서 발표된 셈이죠.

[전략] 박정희는 수출지원을 없애고 수입규제를 풀고, 물가가 다락같이 올라도 그냥 내버려두자는 안정화 정책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경제기획원 혼자서 안정화를 외쳤지, 다른 경제부처들은 대부분 반대했다. [이장규. 2014. 『대통령의 경제학: 대통령 리더십으로 본 한국경제통사』, 기파랑. 177쪽]

이 때문에 만약 박정희가 더 오래 생존했더라면 <대책>의 핵심인 ‘안정 중시’라는 핵심 기치가 그렇게 빨리 전면화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물론 당시 물가 압력이라는 객관적 조건 속에서 ‘안정 중시’로의 전환은 대통령의 개인적 성향과 상관없이 불가피했던 조치였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고요. 어찌됐든, 십수년간 지속된 박정희 정권의 경제 철학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대책>이 나온 지 약 6개월 뒤인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정권은 종언을 맞이합니다.

집필자 | 오형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연구 관심 주제는 1990년대 전후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결과이다. 학위 논문으로 <한국 발전국가 전환과 1997년 한보사태>(박사논문)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서 국가의 역할>(석사논문)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운대학교(산업대학), 한서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