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국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화와 고성장을 이루었던 개발국가 모델은 7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대책부터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한 경제정책과 변화의 흐름을 오형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함께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1960-80년대 한국의 경이적인 경제 성장의 이면에 5년 단위의 경제개발계획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제개발계획은 1993년에 이르러 종료되는데요. 아래에서는 이 경제개발계획의 종료는 무엇을 의미하고 그 이유는 무엇일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의 성격부터 보죠. 경제개발계획은 단지 ‘계획’을 명시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일련의 정부 정책을 이 ‘계획’의 목표 하에 종속시켰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를 갖습니다.

개발연대시기에 발전국가의 산업화전략과 거시경제정책은 ‘경제개발계획’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한국과 대만의 경제개발계획은 산업화전략의 방향과 전반적인 경제성장의 틀을 제시하고 견인하는 핵심적인 정책선도수단이었다. 경제개발계획은 또한 정책입안과 정책집행 사이에 고도의 일관성을 유지시켜주고, 각 경제부처간의 업무를 조율하고 조정하는 기제였으며, 시장의 위험과 불안요소를 감소시키고 시장경제기능의 활성화하는 역할도 담당했다. [윤상우. 2002.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위기와 재편: 한국과 대만 비교 연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88쪽]

그런데 경제개발계획이 20세기 후반 모든 국가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또 한국에만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대만에도 이와 같은 경제개발계획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더 ‘강제적’이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입니다. 마치 군대의 모든 활동이 전쟁 승리라는 목표를 위한 계획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처럼, 한국에서 거의 모든 정부 부처의 정책은 이 경제개발계획에 종속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한국의 경제성장이 경제개발계획으로 가능했다고 이야기하는 정부 홍보물

한국과 대만의 경제개발계획이 지향하는 목적과 역할은 동일하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미세한 차이가 내재되어 있다. 대만의 경제계획은 국가의 정책의지를 공표하고 관련 경제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민간 경제행위자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간접적이고 온건한 정책수단으로서 인식되지만, 한국의 경제계획은 반드시 달성되어야 하는 범국가적 차원의 목표로 이해되어지고 실제로 이를 위해 모든 수단을 총력동원하는 반강제적인 정책수단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한국은행, 1993: 25). [윤상우. 2002.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위기와 재편: 한국과 대만 비교 연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87-8쪽]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은 1962년부터 5년 단위로 추진되어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습니다. 다만, 이 계획이 표방하는 가치가 30여년 동안 동일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은 잠깐 지적할 필요가 있습니다. 1979년 이전까지는 ‘성장’, ‘안정’, ‘균형’, ‘능률’과 같은 가치가 전면에 내세워진 반면, 1980년 이후부터는 여기에서 ‘성장’이 사라지고 ‘자율’과 ‘개방’과 같은 가치가 부상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경제안정화종합대책>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어쨌든 1992년부터 시행되던 제7차 경제개발계획(정확한 명칭은 ‘경제사회개발계획’)은 대통령 김영삼의 임기 첫 해인 1993년에 중도 폐기되었습니다. 그 대신 ‘신경제 5개년 계획’과 ‘신경제 100일 계획’이 등장했죠. 흥미로운 점은 1993년의 경제개발계획 종료에 대한 해석이 다소 갈린다는 것입니다.

1993년, 경제개발계획이 종료되고 신경제 100일 계획이 등장했다

KDI - 신경제 5개년 계획 지침 (1993)

KDI - 신경제 5개년 계획 지침 (1993)

대부분의 학자들은 경제개발계획 종료를 한국에서 국가(구체적으로 정부)가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경제 성장을 추진했던 이른바 ‘발전국가’가 해체되는 주요한 과정으로 해석합니다. 이 무렵이 되면 한국의 자본주의는 1970년대와 전혀 다른 원리로 움직이기 시작하고, 더 이상 국가 주도성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발전국가의 상징과도 같던 산업정책은 1980년대 말부터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더 과감하게 해체되었고, 1990년대 중반이 되면서 기본적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는데, 이는 여러 핵심산업에서 과잉설비 · 생산을 야기했다. (중략) 가장 상징적으로 1993년에 5개년 개발계획이 폐지된 한편, 1994년에는 경제기획원이 폐지되고 (중략) 재무부와 통합하여 재정경제원이 설립되었다. 발전주의의 잔재는 곳곳에서(가령 일부 첨단기술산업에서 연구개발 지원 등) 여전히 발견되었지만, 발전국가의 해체는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중반(말하자면 1995년)에 실질적으로 완료되었다. [신장섭 · 장하준. 2004.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 무엇이 문제인가』, 장진호 옮김, 창비. 121쪽]
발전국가 재편의 대략적인 방향은 발전국가의 정책적, 제도적 후퇴와 재벌기업 등 민간행위자의 경제주도권이 강화되는 탈발전국가로 나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영삼정권 시기에 와서는 국가의 성격과 성장체제의 특징이 개발연대시기에 전형적으로 나타났던 발전국가적 양상보다는 신자유주의적인 규제국가, 또는 에반스가 언급했던 ‘중간국가’에 보다 가까운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성장체제는 국가주도적이라기 보다는 시장주도적인 성격이 더욱 강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윤상우. 2002.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위기와 재편: 한국과 대만 비교 연구」, 고려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246쪽]

반면에 일부 소수 학자들을 중심으로, 경제개발계획 종료를 두고 더 이상 ‘국가 주도성’이 유지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견해도 존재합니다. 이 논자들은 정부의 관리 또는 조정 기능이 약화되지는 않았다는 점 또는 중장기 계획이 계속 설정되었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합니다.

한국 정부는 1994년 경제기획원을 폐지하여 재정경제원에 흡수 통합시키고 1997년 종료된 제7차 신경제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92-1997)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전체 경제에 대한 계획 수립 역할을 종료했지만 여전히 산업통상자원부와 미래창조과학부, 중소기업청 등 각 경제부처들을 중심으로 산업별로 중장기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정책 집행을 직접 관리하고 조정한다. [김경미. 2017. 「발전국가 모델의 지속과 재구성의 정치: 비교역사적 관점에서 본 한국 발전모델의 진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177쪽]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중단된 것은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취임한 이후 노태우 정부에서 작성된 제7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93-1997)을 폐기하고, 신경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신경제 5개년 계획도 5년간의 경제발전계획이었다는 점에서 그 자체도 경제개발 계획이 단절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윤대엽. 2011. 「수출주도 발전의 위기와 산업정책의 정치, 1980-2007 : 이념, 제도와 발전의 거버넌스」, 연세대학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37쪽]

이렇게 서로 다른 해석이 있는 것처럼, 1990년대 초중반 (대통령으로 구분하자면 노태우-김영삼 대통령 시기) 경제정책의 성격은 어느 한 쪽 방향으로 확실히 규정하기 어려운 ‘과도기’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시기와 같이 국가주도성이 강했느냐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아니지만,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에서 더 이상 국가 주도성은 없으며 모든 경제 활동이 다 민간 경제 주체들의 몫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1993년 경제개발계획의 종료에 대한 해석도 이러한 과도기에서 어떤 측면을 더 중요하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집필자 | 오형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연구 관심 주제는 1990년대 전후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결과이다. 학위 논문으로 <한국 발전국가 전환과 1997년 한보사태>(박사논문)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서 국가의 역할>(석사논문)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운대학교(산업대학), 한서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