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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국사회는 외자 유치와 국내 자본시장의 글로벌 개방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97년 위기에서부터 현재 새로운 위기를 누적해가기까지, 한국의 경제구조와 제도 각 부문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제도적 변화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장진호 선생님과 함께 돌아봅니다.

해외자본투기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론스타 외환은행 매각사건 (사진: 경향신문)

1997년이 이미 20년 이상 지나간 시기이지만, 그 해의 외환위기를 전후로 한 한국 경제와 사회의 변화는 현재 한국인들의 모든 생활영역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아직도 기억나는 사실은 1997년 말의 그 위기 직전 거의 한해 내내 상황이 낙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공중파 TV 방송국에서는 “경제”를 중병과 위험에 빠진 어떤 인물로 의인화하여 “우리 경제를 살려내라”는 식의 다소 희극화된 연속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고, 뉴스에서는 이전에 들어보지 못하던 “희망퇴직”, “명예퇴직” 등의 단어가 점차 자주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 후보는 선거 유세기간 중 연말의 위기가 명백해지기 전까지 ‘세계 7대 경제강국’의 비전을 유권자인 국민들에게 역설하기도 했다. 이 비전이 가능하기까지, 또 위기에 이르기까지 해방 후 국내 상황의 전사(前史)는 다음과 같다.

국내 경제와 산업구조는 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드라이브를 본격화한 이래, 1970년대 베트남전과 미군철수 등 안보위기와 맞물려 중화학공업화로 급속히 전환하였으며, 해방 후 처음으로 1980년대 중반 4년 연속 무역수지 흑자를 경험하여 ‘외채망국론’의 망령을 떨쳐내었고, 이 와중에 1986년 아시아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였다. 1980년대에 자주 개최된 서울국제무역박람회는 거대 중화학 분야 수출대기업으로 성장한 한국 재벌들의 위용을 내외로 과시하여 1993년에는 개발도상국 최초로 대전에서 엑스포 즉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수 있게 되기도 하였다. 정부의 적극적 산업정책과 효과적인 관료들의 리더십, 재벌창업자들의 개척자적 자본가정신이 자주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농촌을 떠나 도시공장에 취업한 노동자와 서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을 감내한 ‘근검 자본주의’의 결과이기도 했다.(Amsden, 1989; Wade, 1990; Song, 1990; Evans, 1995; 구해근, 2002)

이와 같은 1980년대까지의 경제산업 구조의 전환과 재벌의 성장에 더해, 1987년 민주화 이행과 노동자 대투쟁, 서울올림픽을 배경으로 ‘소비 자본주의’가 국내에서 꽃피기 시작하였다. 1960-70년대 정부가 국민들에게 적극 독려하던 저축은 더이상 미덕만은 아니게 되었다. 컬러TV와 프로야구의 시대가 1980년대 전두환 신군부 정권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 1985년 울산의 현대백화점은 본점을 서울 압구정으로 이전하였고, 1989년 롯데쇼핑은 롯데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91년 신세계백화점은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1990년대 초에는 소비주의적 강남 압구정의 오렌지족, X세대에 대한 담론이 부상하였고,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며 가요계를 댄스와 힙합이 결합된 아이돌 무대로 재편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발전주의적 근대화/산업화가 무르익어 한국 자본주의가 소비 자본주의 혹은 중산층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하기 시작한 1980년대말에서 1990년대 초중반의 시기는, 동시에 국내에서 정치적 민주주의로의 이행기와 중첩되었다. 1987년 6월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 등의 개헌을 얻어낸 민주화의 열기와 같은 해 여름 노동자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분출, 그리고 전대협 등으로 조직화된 전국적이고 변혁지향적 학생운동의 분출은 단지 신군부 정권의 타도로 상징되는 정치사회의 민주화 이상을 요구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1980년 서울의 봄이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5.18 광주의 비극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급진화된 학생운동은 본격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사회혁명 노선을 수용하도록 하였고, 이 와중에 전대협의 주류는 심지어 북한의 주체사상을 운동의 이념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980년대는 이 시기를 ‘혁명의 시대’로 개념화하는 회고가 이후에 나올 정도로 혁명적 열정과 활동이 학생운동과 각종 ‘민중운동’을 포함한 사회운동 전반에 확산되어 결과적으로 신군부 통치에 균열을 내고 민주화 이행에 어느 정도 성과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다수 사회운동세력의 정치경제적 대안으로 간주되던 동구권과 소련의 사회주의는 바로 그 시기부터 시작하여 1990년대 초까지 몰락하였고, 국내에서 정치사회 개혁과 민주화, 그리고 노동자의 세력화를 위한 움직임은 과거보다는 세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성적으로 혹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며 1997년까지 계속되었다. 1994년 민중적 시민사회 운동을 표방한 참여연대가 발족하였고, 1995년 민주노총이 출범하였으며, 1996년 성탄절 다음날 새벽 보수여당의 날치기 노동법 통과에 대한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사회적 호응을 얻으며 정국을 뒤집기도 하였다. 총파업을 경험하며 1997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정당 결성을 결의하게 되고 그해 10월 민주노총위원장 권영길을 후보로 내세운 ‘국민승리21’이라는 정당이 결성된다(이후 민주노동당으로 발전).

다른 한편, 1987년 대통령 직선제는 실시되었으나 신군부의 일원인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제6공화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988년 4월의 13대 총선에서 신군부가 만든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다른 정당과의 연합을 시도하였고, 제1야당이 된 김대중계의 평민당에 뒤처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김종필의 공화당과 함께 1990년의 3당합당 보수대연합을 통해 민자당을 창당하게 된다. 이후 김영삼은 1992년 대선에서 민자당 후보로 선거에 승리하였고 1993년 등장한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하나회’등의 정치군인 해체로 인기를 높이더니, '신경제' 개혁과 세계화를 내세우며 경제자유화를 추진하였다.

국내에서 1994년부터 정권의 구호로 사용된 ‘세계화’는 박정희 시기의 포괄적 개발주의의 약화된 버전인 1980년대 제한적 개발주의를 더욱 약화시키는 동시에, 1980년대부터 김재익으로 상징되는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신자유주의의 흐름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구호이기도 했다.(Kim, 1997; 신장섭•장하준, 2004) 발전주의 시기를 상징하던 경제부처인 경제기획원은 1994년 재무부와 통합되며 거대 재정경제원이 되어 사라졌다. 이는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간 상호 경쟁 속에서 존재해온 정책결정의 엄격성 효과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알려지기도 한다(이와 반대로, 1990년대 중반 신자유주의화의 흐름에서 추진된 한국은행 독립성 강화는 재경원과의 정보 비공유로 외환위기에 일조한 것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 역시 1982년부터는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으로 바뀌어 지속되다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1993년 폐지되고 ‘신경제 5개년계획’이 등장한다. 발전지향적 목표를 갖는 국가의 장기연속적인 정책 목표 설정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경쟁규제적 산업정책이 사라진 상황에서 세계화와 규제완화를 핑계로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입도 이 시기에 허가되었다. 철강산업 등 중복투자의 문제도 심화되었다. 이후 외환위기의 단초가 되는 대외채무의 폭발을 불러온 창구가 된 종금사 난립 허용도 이러한 잘못 설계된 규제완화의 결과였다.

또한 대우재벌 총수 김우중(1989)의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에서 보이듯 재벌의 해외직접투자 등 세계진출 및 규제완화 요구와, 1990년대 초부터 국내 금융시장 개방을 위한 미국측의 의도를 반영하여 매년 열린 한미금융정책협의회 등의 맥락에서 이러한 개발주의의 전환은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선진국클럽으로 홍보된 OECD에의 한국가입을 국내 금융시장 개방 가속화 수용과 맞교환하고자 했고, 한국정부는 이를 수용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금융규제 완화, 시장개방 등 개발주의의 전환이 적절한 금융감독 체계 마련 등 국내의 대비가 미흡하고 전체적 상황의 정확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떠밀리듯이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는 1989년 말 <워싱턴포스트> 등 외신의 당시 한국경제에 대한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조롱에서 드러난 것과 같이 1990년대 초중반까지 경제에 대한 장밋빛 전망에서, 중반 이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급작스런 우려로의 전환, 그리고 1997년의 위기와 파국으로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