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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국사회는 외자 유치와 국내 자본시장의 글로벌 개방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97년 위기에서부터 현재 새로운 위기를 누적해가기까지, 한국의 경제구조와 제도 각 부문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제도적 변화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장진호 선생님과 함께 돌아봅니다.

1997년 11월말의 금융위기는 “샴페인을 터뜨린” 기억이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는 매우 갑작스럽게 그리고 당혹스럽게 다가온 것이었다. 1996년의 경제성장률이 이전 해보다 감소해 경기침체라는 언론보도가 있었지만 여전히 경제성장률은 7.6%였다. 하지만 이것은 수출액 감소로 인한 무역적자 증가(당해 약 230억 달러) 및 대외채무 폭증(1천억 달러 이상)과 결합되었다. 먼저, 수출의 어려움은 김영삼 정부의 환율정책에 기인한 점도 있었는데, 1995년에 달성한 ‘1인당 국민소득 1만불시대’의 업적을 인위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원화 고평가 환율정책을 유지하다 보니 수출에 어려움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삼성의 반도체 수출의 싹을 자르기 위한 일본 반도체 업계의 담합에 기반한 반도체 가격인하 출혈 수출도 전반적인 국내 수출 악화에 기여했다. 경상수지 적자를 자본수지 흑자로 보전하기 위해, 강한 달러를 추구하고 엔 약세를 허용한 클린턴 행정부 주도 G7의 1995년 ‘역플라자 합의’는 또한 이를 뒷받침하였다(10년 전인 1985년에는 일본의 수출 공세를 완화시키고 미국 기업들의 수출을 자극하려는 인위적 저달러-엔고 정책인 ‘플라자 합의’가 주요국들 사이에 이루어져, 일본 경제의 버블 형성과 일본 기업들의 동남아 생산수출기지 구축을 자극하였다). 또하나 요인을 꼽자면 중국이 1978년 개혁개방을 한 이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수출공장으로 편입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수출상품 가격경쟁에서 유력한 플레이어로 새로 부상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음으로 대외채무의 폭증과 관련해서는, 이 무렵 김영삼 정부가 천명한 세계화 기조하에 재벌들의 해외투자 혹은 해외채무와 관련된 규제가 해제된 점, 그리고 국내 금융업 진출에 대한 규제가 해제되어 모든 재벌이 종합금융회사 즉 종금사 설립에 뛰어들어 이러한 해외채무 폭증에 일조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재벌들은 이렇게 얻게 된 외화채무로 국내 과잉 투자, 그리고 동남아 금융시장/부동산 투기 등과 같은 대외투자에 몰두하였다. 후자의 경우 1996년에는 막대한 수익을 거두기도 하였다.

1997년 1월말 당시 국내 재계14위였던 한보그룹의 부도 즉 “한보사태”를 시작으로 하여, 7월 재계4위 기아자동차의 부도 등 다수의 대기업들이 1~2년 사이에 연쇄적으로 부도를 맞음으로써 위기는 전면화하였다. 그룹 총수의 취미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지도 했던 사업인 삼성자동차도 결국 19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2000년 프랑스기업 르노에게 인수된다. 1998년 현대에 이어 재계 2위였던 대우재벌도 1999년 10월 워크아웃 이후 그룹이 해체되었고 대우자동차는 2000년 11월 최종부도 이후 승용차 부문이 2002년 미국 GM에 인수된다. 기업들의 과잉중복투자(overcapacity), 이를 가능하게 한 과다차입, 과다차입의 물꼬를 튼 해외차입 규제/해체 및 국내금융기관의 대출관행 등이 모두 위기의 탑을 쌓아올린 셈이었지만, 무엇보다 기업의 연쇄부도가 1997년 즈음에 폭발한 것에는 이러한 국내적 요인들의 누적이 ‘임계점’에 달한 측면과 더불어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한 국제적 요인들도 중요하다.

몇 가지 대외적 배경을 구성하는 정황들, 즉 미국의 금융시장 개방압력, 역플라자 합의와 일본의 국내 반도체 수출 견제, 중국 수출품의 가격압박 경쟁 효과 등은 앞에서 약간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것에 더해 1997년 1월 미국은 금리를 올림으로써 자국의 수입시장을 수축시키는 동시에 동남아와 한국 금융시장에 투자된 해외자금을 일거에 대규모 썰물처럼 빨아들이게 된다(유인효과). 이로 인해 국내의 달러화 외환보유고는 급속한 고갈을 경험하면서 많은 대외부채를 지닌 국내기업들의 채무이행이 어려워지며 파산으로 나아가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또 동남아 등에 대외부채 자금으로 투자했던 국내기업들 역시 지역적으로 조성된 자본이탈이라는 위기의 ‘전염 상황(contagion effect)’에서 큰 타격을 입고 투자 손실을 경험하며 채무상환이 어려워진다. 동남아의 위기가 한국까지 전이되어 ‘동아시아 금융위기’라는 역사적 위기가 된 일격은 여기에서 발생했다.

추가로, 이렇게 조성된 위기 상황에서 국내에 돈을 빌려준 해외채권자들은 평상시 해오던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채무의 조속한 상환을 요구하는 일이 발생한다. 여기에는 국내 대기업들의 연쇄파산과 신용등급 강등으로 한국에 대한 대출의 위험도가 높게 드러난데 이어서(유출효과), 특히 해외채권자들이었던 일본은행들의 경우 1997년 대출자산 대비 더 높은 자기자본 비중을 요구하는 BIS 자기자본 기준이 일본 국내에 도입되었고, 일본 금융권 내부에 위기상황이 고조된 것과도 연관되었다(1997년에만 일본계 은행의 한국대출 관련 150억 달러 회수). 심지어 국내 기업들의 대외투자가 장기적 성격의 그것이었던 데 반해, 이에 동원된 해외부채로 마련된 자금은 그 상환에 있어서 1년 이하 단기적 성격의 그것이었던 ‘만기불일치(maturity-mismatch)’ 문제, 즉 ‘단기차입-장기투자’에서 빚어진 문제도 심각하였다. 국내 금융시장에 투자된 외자의 급속한 철수와 국내 기업에 대출된 대외채무의 투자 실패 및 급속한 상환 요구, 이 요인들의 결합이 외환보유고 고갈이라는 사태를 불러온 방아쇠가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무디스 등 영향력있는 국제신용평가사들에 의한 전례없는 단기간내 한국기업과 국가에 대한 신용등급 평가 하향조정은, 급속한 외자 철수의 지시 신호처럼 작동하여 국내에서 정부와 기업들이 대응의 시간을 갖지 못하고 망연자실한 상태에서 기업 파산과 실업, 주가 폭락과 원화 가치의 급추락을 목격하도록 만들었다.

외환고갈(1997년 말 외환보유고 300억 달러에서 11월경 바닥)과 대외채무(같은 시기 외채 1,530억 달러) 이행의 압박 속에서, 한국정부는 세 가지의 선택지 앞에 놓이게 되었다.첫째는 국가의 대외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즉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채권자와의 약속 불이행에 해당하기에 국제신용도의 급추락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정부의 대내적 자율성을 보다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선택가능할 수 있다. 1998년 러시아는 아시아 금융위기의 여파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하였다.

두 번째는 개발주의 시기 동안 차관의 형태로 누적된 외채가 1980년대 초에 남미의 몇 개 주요국과 함께 세계 상위권에 포함되어, 국내에서 외채위기 망국론이 제기되었을 때 전두환 정권이 일본의 나카소네 정권을 통해 해결한 방식대로 일본 등과 양자협의를 통해 일시적으로 달러화를 빌려 갚는 방식이다. 1997년 위기시 김영삼 정부 역시 과거 선례가 있기에 일본 정부로부터의 외화 차입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특사를 일본에 파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본측의 거부로 주요한 선택지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미국 클린턴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요구/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일본측 자료에 알려져있다(김성택•정규재, 1998). 또한 1980년대와 달리 김영삼 정부는 구 조선총독부 건물 폭파 및 대통령의 강한 반일발언(1995), 1996년부터 본격화된 일본정부의 독도 자국영토 주장과 공식화 등으로 양국관계가 좋지 않기도 했다. 물론 일본이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거절할 여지는 과연 없었는지, 일본 역시 한국의 위기와 이후 IMF 구조조정 와중에서 이떤 이익을 기대하며 행동을 취한 것은 아니었는지 면밀히 짚어 볼 필요는 있다(위기 이후 제3금융권 즉 대부업의 러시앤캐시/산와머니 등 일본금융 장악).

세 번째는 IMF 즉 국제통화기금을 통해 구제금융을 조달받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정부가 마지막 IMF 구제금융 신청보다 일본과의 양자해결을 바랐던 것은, IMF 구제금융이 갖는 주권간섭적 성격 때문이었다. IMF는 국제수지 적자문제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부족한 나라들에 구제금융을 제공해주는 대신 순수하게 자금과 이자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제공 대상국에 강한 구조조정 조치들을 요구했는데 이것들은 그 나라 정부의 주권을 훼손한다고 판단되기조차 할 정도였다. 특히 이러한 성격은 1980-90년대부터 강화되었는데, 이는 1995년 멕시코 금융위기 등 남미의 사례에서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자금제공에 함께 관여하는 세계은행과 IMF가 미국 수도인 워싱턴DC에 소재하기에 이들 기관들이 구상하여 자금제공 대상국에 구제금융의 댓가로서 집행을 요구하는 부대조건들(conditionalities)을 한데 일컬어 ‘워싱턴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다시 말하자면 ‘워싱턴에 소재한 국제경제기구들이 합의한 조치들’로 이름붙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의 강제 집행은 사실상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대상국들에게는 피해와 수치감을 줄 수 있는 주권침해적인 개입이기도 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앞의 두 선택지가 배제되고 제거된 상황 속에서 마지막 남은 세 번째 IMF 구제금융을 선택해야만 했다.

1997년 11월 19일 경제위기에 책임을 지고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물러나고, 임창열이 그 자리를 맡게 되면서 정부는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마침내 결정하였다. 당일 국내를 방문중인 스탠리 피셔 IMF 부총재와 미 재무부 차관보 티머시 가이드너를 만난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저녁 10시 IMF 구제금융 요청을 국민들에게 공식 발표하였다. 11월 24일부터는 17명의 IMF협의단이 한국 정부, 한국은행, 은행감독원과 통화 및 재정정책, 금융 구조조정, 무역 및 자본시장 개방, 기업지배구조 개선, 노동유연화 등에 대해 협의하였는데, 이는 후에 역대 IMF 구제금융 지원국 중 민간 기업 분야를 망라한 전례 없이 포괄적인 특정 국가경제 전체에 대한 개입으로 간주된다. 본래 지원 대상국의 경상수지 균형문제만을 다루기로 한 IMF 설립헌장의 목표와 사명에서 서서히 이탈(mission creep)해온 상황이 정점에 달한 셈이었다. 한국 정부는 이상의 협의내용 시행에 대한 양해각서를 제출하였다. IMF측의 무리한 대외비 부속 합의서 제출 등으로 협상이 순조롭지만은 않았고, 11월 28일에는 미 대통령 클린턴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화로 한국의 IMF행을 강하게 압박하기도 하였다. 12월 3일에는 IMF 총재 미셸 캉드쉬와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참석한 IMF와의 협상이 최종적으로 발표되었다, 여기서 최종 자금지원 규모는 550억 달러로 결정되었다(IMF 210억 달러, 세계은행 100억 달러, 아시아개발은행(ADB) 40억 달러, 미국 50억 달러, 일본 100억 달러 등).

비록 모라토리엄은 아니었더라도, IMF 구제금융 신청 자체가 국가부도 상황의 대외 공표나 다름 없었고, 국민들은 불안 혹은 모멸감 등을 느껴야했다. 프랑스 출신의 캉드쉬는 당시 식민지 총독과 같은 위압감을 주며 한국정부 상대자들을 만나거나 과잉된 발언과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그해 12월 예정된 대통령 선거 후보자들에게 IMF 구제금융의 부대조건들에 대해 차후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이를 이행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요구한 일이다. 이는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이자, 최초로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루게 될 야당 출신 정치인 김대중이 유세 과정에서 제기한 ‘IMF와의 재협상’ 주장에 대한 고압적 반응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재협상의 여지를 내부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수세적 입장을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는데, 당시 보수여당 후보 이회창 캠프측은 이러한 재협상 언급을 ‘대외신뢰를 해침으로써 국익에 반하는 행위’라는 프레임으로 몰아붙여 캉드쉬의 반응으로 이어진 측면이 있었고 결국 김대중 후보측도 ‘재협상’ 주장을 없던 것으로 하고 주요 대통령 후보들이 서명에 동참해야 하는 망신스러운 일마저 있게 되었다. 내부 정쟁이 국가의 대외적 행위에 있어서 선택 여지를 가로막은 국내 정치권의 한심한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