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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며 한국사회는 외자 유치와 국내 자본시장의 글로벌 개방을 숙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97년 위기에서부터 현재 새로운 위기를 누적해가기까지, 한국의 경제구조와 제도 각 부문에서는 어떤 변화들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제도적 변화로 인해 우리는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었는지 장진호 선생님과 함께 돌아봅니다.

보통 이 위기를 국내 다수가 쉽게 ‘IMF 위기’라고 부른다. 그런데 IMF는 구제금융을 제공한 주체이지 위기의 원인이 아니기에 이 개념은 잘못된 것으로 반박될 수도 있다. 하지만 1997년과 그 이후까지 연장된 위기는 ‘외환위기+IMF 위기+구조조정 위기’로서 복합적 성격을 가진 위기라고 볼 수 있다. IMF 자체도 위기의 소방수 역할만이 아니라 방화범의 역할에 공조했다는 말이다.

위기 후 한국에서 착수된 IMF 프로그램은 거시경제 긴축, 시장개방, 구조개혁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구분될 수 있었다. 먼저, 거시경제 긴축은 고금리와 긴축예산을 정책으로 강제하였다. 콜금리는 위기전 11-13%에서 위기 후 30% 이상이 되었다. 예산흑자 유지 혹은 적자 최소화를 위해, 정부의 대규모 유동성 자금지원은 이후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시 미국 정부가 한 것과는 반대로 가급적 억제되어야 했다. 고금리는 인플레이션 억제와 시장 안정을 명분으로 시행되었는데, 이는 오히려 기업의 채무부담을 가중시키고 흑자도산을 포함 다수의 국내 기업들이 파산하는 데 일조했고, 기업들이 해외자본의 인수대상이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표 1>의 M&A 비중 참조). 하지만 거시경제 긴축으로 기업의 대규모 파산과 실업이 일어나는 등 1998년 한국경제가 너무 크게 추락하면서 정부는 재정확장을 IMF에 요청했고, 한편으로 그해 하반기 러시아/브라질의 금융위기, 그리고 뉴욕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의 부도 가능성으로 인한 금융공황 등 세계 경제가 급변하는 사태가 지속되자 IMF는 확장적 케인즈주의 정책전환(금리 인하, 은행에 대한 공적자금 투입 등 적자재정 조치)을 용인하였는데, 이것이 이후 국내 경기회복에 결정적으로 일조하였다.

둘째, 무역 관련 보조금 및 수입다변화 정책은 폐지되었고, 1992년부터 개방된 국내주식의 외국인 소유에 대한 제한이 점차 축소/폐지되었다(1992년 10%-> 1997년말 55%-> 1998년 5월 100% 소유 가능). 외국 금융기관의 국내 금융기관 인수합병이 허용되었다. <그림 1>에 나타난 것과 같이 이는 국내 상장기업 주식에 대한 외국계 투자자의 지분율을 크게 상승시켰는데(1997년 12.3%-> 2004년 42%), 2004년의 이러한 지분율 비중은 주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높은 수준이며 헝가리(78.0%), 네덜란드(60.6%), 핀란드(49.0%), 멕시코(43.5%)에 이어 세계 5위 수준이었다.

이 비중은 2010년대와 2020년 현재에도 3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코스닥 시장을 제외한 유가증권시장의 경우 2019년 38.1%). 그리고 이러한 투자는 주로 금융기관, 블루칩 대기업, 수출업체에 집중되었다. 이는 시중은행들과 국내의 대표적 생산/수출기업들의 경우 지분의 절반 혹은 그 이상을 외국계 투자자들이 보유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장기업의 배당금 역시 외환위기 이전 1990~96년중 연평균 1.4조원에 불과했으나 2004년에는 10조원을 돌파하였으며 외국인에 대한 현금배당 규모도 2004년 이후 4조원을 상회하게 되었다(<표 3>)

IMF의 국내 프로그램에 포함된 셋째 요소는 구조조정인데, 이는 국내 네 부문의 구조개혁에 집중되었다. 이는 금융부문, 기업부문(특히 재벌구조), 노동시장부문, 공공부문으로서, 가장 논란이 될 수 있는 IMF ‘사명이탈(mission creep)’의 대표적인 개입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의 개입은 구제금융 지원이라는 외적인 유인과 압력 요소만이 아니라, ‘내부의 정당화’ 과정을 거쳐서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내부의 정당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다시 세 영역이라고 보이는데 이는 1)자본시장 중심의 영미식 경제시스템을 소위 ‘글로벌스탠다드’로 간주한 관료사회를 비롯한 경제전문가의 신자유주의화(여기서 고위 경제관료들 및 경제학자들의 미국 유학 폭증 및 관료들을 선발하는 고시 경제학의 신자유주의화는 중요하다), 2)특히 노동시장 영역을 포함하여 기업활동의 규제완화를 원하는 재계의 요청, 그리고 3)재벌을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이자 보수적 개발주의 및 정실주의와 결부된 개혁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외국자본을 비롯한 자본시장투자자를 경제민주화 혹은 개혁의 동맹으로 수용한 국내 주류 시민사회운동의 지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금융부문에서는 금감위의 출범 등 금융감독구조의 정비와 그 감독구조 기준으로서 시중은행들에 있어서 신(新)자산건선성 분류 기준인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위험가중자산 대비 8%)의 도입, 금융기관의 사외이사제 도입, 상업은행과 종금사 등의 인수합병 강제 및 폐쇄가 주요 내용이 되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거시경제 긴축조치 즉 금리인상의 효과와 마찬가지로 은행대출을 받은 기업들에게 유동성 위기와 신용경색(credit crunch)을 불러와 파산 등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는데, 자기자본비율 확충을 목적으로 은행들이 기업대출을 억제 혹은 기존 대출을 회수하거나 연장거부하는 사태가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는 다시 금융기관들에 부실채권(NPLs)을 증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기업파산으로 이렇게 불어난 은행권 부실채권은 다시 이 부실채권 매매시장 및 기업 인수합병시장에 주로 참여한 외국계 금융기관의 막대한 수익원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으로 파산을 면한 은행들의 경우 이후 외자의 인수¹ 혹은 지분 50% 이상을 크게 초과소유하는 다수주주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보다 안전한 수익성 중심의 대출을 추구하게 되면서 기존의 기업대출에서 (주로 담보대출인) 가계대출을 선호하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한편으로 이는 천문학적 규모로 누적되어 현재 새로운 위기의 도화선으로 지목되고 있는 국내 가계부채 문제의 원인이 되었고(GDP 대비 가계부채 비중이 2020년 100%를 넘어 세계 1위 수준에 도달했다), 다른 한편으로 부동산 투기 및 지속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의 자금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주로 정부의 예금보호 하에 안정적으로 예금을 유치하고 주로 국내 영업으로 수익을 올리는 시중은행들은 공적자금 지원이라는 방식으로 ‘위험을 사회화하였으나, 수익을 사유화’하는 문제는 지속되고 있다. 또한 위환위기 이후 은행의 이러한 수익성 중시 경영은 은행의 펀드, 보험(방카슈랑스), 심지어 KIKO 등 금융파생상품 판매로도 이어지게 되었는데, 2008년의 3조 이상의 기업 손실을 가져온 ‘키코사태’는 은행에 대출을 받는 중소기업들에 대해 은행측이 파생상품을 준강제로 판매한 결과 기업들이 대대적인 손실을 입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불완전판매’ 소송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은행측의 승리로 끝이 났다.) 현 정부에서 금감원은 기업들의 피해 재조사 및 은행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특히 외국계 은행과 국내 은행의 과반수 이상 지분을 보유한 외국계 투자자들을 중심으로 혹은 이들을 핑계로 배상에 응하지 않거나 반발하는 문제가 있게 되었다.


1) 제일은행 -> 뉴브리지캐피탈[1998] ->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2005];
한미은행 -> 칼라일[2000] -> 한국시티은행[2004]; 외환은행 -> 론스타[2003-2012]

기업부문 특히 재벌계 기업들은 부채자본비율(debt-to-capital ratio)의 급격한 감축을 요구받았고, 이는 이후 국내 선도적 대기업들의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져 투자자들에 대한 배당에는 기여하였으나, 위기 직후에는 성장을 위한 투자 위축, 비정규직화 및 고용축소를 통한 노동비용 감축, 우량자산의 헐값매각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계열사간 대출보증 및 내부거래 금지 조치는 국내 반도체 산업의 성장 경험에서 보여지듯 초기에 장기적 손실을 감수한 기업집단 차원에서의 인내자본 투자가 억압되고, 계열사 주주들의 수익성 확보에 초점이 맞추어진 기업 구조의 개혁 방향이었다. 이는 재벌 창업자 가족들의 계열사들에 대한 영향력을 억제하는 측면에서도 정당화된 측면이 있었다.

노동시장부문에서는 1996년말 노동법 날치기 사태가 노동자 총파업으로 2년간 유보된 상황이었으나, IMF의 개입을 통해 이를 다시 무효화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더욱 가혹화하는 역코스가 추진되어 정리해고와 파견노동이 법제화되었다(1998년). 정리해고제 등은 원래 12월초 발표된 IMF와의 합의 사항에 없던 것이었으나,한국 측의 제안(김수길 외, 2003)으로 도입되었다. 해외은행들의 국내 대출 회수를 만류하기 위해 1997년 11월 말 미국에 날아간 김기환 특사²의 구상에서 비롯된 소위 ‘IMF 플러스’(정리해고제 수용, 외환관리법 전면 개정, 적대적 인수.합병(M&A) 허용, 집단소송제 도입 등)의 핵심 내용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IMF 플러스‘를 미 재부부 부장관이던 로렌스 서머스를 만나 미국측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제시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고용안정 공약을 뒤집고, 이후 12월말 당선자의 신분으로 김기환과의 만남에서 이를 수용하여 같은 날 미 재무부 차관 데이비드 립튼과의 대화에서 노동유연화에 대한 양자의 입장을 공유할 수 있었다. 이후 이미 임시직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던 국내에서 비정규노동 비중은 크게 상승하였고, 이러한 국내 노동비용 감축 혹은 억제는 국내 재계와 외국자본 투자자의 입장에서 ‘공동으로’ 원하는 방향이었다. 이는 국내에서 노동생산성이 계속 증가하고 있음에도 1997년 이후 거의 정체된 상황을 보여주는 실질임금 추이를 설명해주고 있다(<그림 2>).

<그림 2> 실질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추이 (1980년=100)
자료: 김유선(2019)


KDI 2대 원장 역임, 외환위기 이후 골드만삭스 국제자문
2002년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으로 참여정부 시절 ‘동북아금융허브’를 구상하였으며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공공부문 개혁에 있어서는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가 새롭게 추진되고 강화되었으며, 공무원 채용에서 민간부문 중간경력자 채용이 쉽게 가능하도록 변화되었고, 정부의 산업규제가 축소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는 공공부문 경쟁력 강화와 공기업 매각에 따른 재정수입을 겨냥해 1998년 7월 공기업 민영화 방안을 발표하고, 포항제철, 한국통신, 담배인삼공사, 한국전력 등 총 11개 공기업에 대한 민영화를 추진했으나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 전력과 철도 등은 다행히 민영화가 저지되었다(물론 노무현 정부 말기 공기업을 증시에 상장해 일부를 유통하려는 정부측의 검토는 있었다). 포항제철은 2000년 민영화되어 포스코(2002년)가 되었고, 담배인삼공사는 2002년 민영화되어 KT&G(2002년)가 되었다. 한국통신 역시 2002년 민영화되어 KT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