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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강력한 주도로 산업화와 고성장을 이루었던 개발국가 모델은 7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대책부터 외환위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주요한 경제정책과 변화의 흐름을 오형석 선생님의 설명으로 함께합니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민간 경제 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 보장을 전제합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든 현대 국가는 다양한 방식으로 민간 경제 활동에 개입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공정거래제도입니다. 우리가 이미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들었듯이, 공정거래제도는 시장의 과도한 독점이나 과점으로 인한 폐해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죠. 공정거래제도가 무엇인지는 이 제도를 총괄하는 기구인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의 설명을 참고해보죠.

공정거래제도는 시장경제체제의 기본원리인 ‘기업간의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경제활동의 기본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입니다. [공정거래위원회 홈페이지 ‘설립목적과 기능’]

그렇지만 이 같은 설명은 마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공정거래제도를 원리상 전제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현대 국가들은 공정거래제도를 처음부터 갖추었다기보다 특정 역사적 시기에 그것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죠. 즉, 공정거래제도의 더 구체적인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원리적인 필요뿐 아니라 제도가 형성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해야 합니다.

1981년 5월 7일, 공정거래위원회 출범과 더불어 현판식을 진행하는 모습

공정거래제도는 1981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공정거래제도의 시작은 왜 1981년이었을까요?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공정거래제도의 전사(前史)를 파악해야 합니다. 제도가 도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공정거래제도는 물가안정을 위한 다양한 조치의 일부로 논의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63년 이른바 ‘삼분(三粉) 사건’을 계기로 최초로 ‘공정거래법초안’이 작성되었던 이래로 1966년의 ‘공정거래법안’, 1969년의 ‘독점규제법안’, 1971년의 ‘공정거래법안’ 등 독과점의 폐해와 관련된 중요한 경제적 사건이나 물가불안 요인이 있을 때마다 꾸준히 독점규제와 물가안정을 내용으로 하는 법안의 제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성장우선주위의 논리에 밀려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사라지곤 했다. 1972년 3월 12일에 최초로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하여 제정 · 공포되었다. 이 법은 최고가격의 지정 및 가격표시제에 관한 규정 이외에 불공정거래를 제한하는 일부 조항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은 공정거래질서의 확립보다는 물가의 직접적인 제한에 주안을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독과점의 원인이나 폐해를 규제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 법은 1975년 12월 31일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함께 폐지되었다. 1976년 3월 15일부터 시행된 ‘물가안정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은 기존의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과 ‘공공요금 심사위원회 설치법’을 일원화한 것이다. 이 법은 독과점품목 등 주요 제품에 대한 가격통제와 경쟁제한적이나 불공정한 거래 행위에 대한 규제기준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중략] 이 법에 의한 불공정거래행위의 규제실적은 1976년에서 1979년까지의 4년 간 약 100건이 이었는데, 그나마도 대부분은 물가안정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 법은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경제기획원내에 내부지침을 마련하고 규제를 실시하기는 하였으나, 기존 유통체계와 거래관행을 가급적 존중한다는 기본방침 하에서 규제하였기 때문에 실제운용에 있어서는 특히 현저하고도 명백한 폐해를 수반하는 불공정거래행위에 한하여 공정거래법 관련법규가 적용되는 등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장상철. 1999. 한국의 개발국가, 1961-1992: 성장의 역설과 국가-기업관계의 변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81-82쪽]

이상의 배경에서 공정거래법(1980년 12월 31일 제정, 1981년 4월 1일 시행. 정식 명칭은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은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했던 경제안정화 종합시책과 유사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1) 1979-80년 당시 ‘물가 안정’이 가장 핵심적인 정책 목표인데, (2) 이는 1970년대와 같은 국가 주도적 성장우선 경제정책의 핵심적인 폐해 중 하나이며, (3) 따라서 향후 한국 자본주의의 주도성은 민간 영역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겠죠.

한국에서 경제정책으로서의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게 된 것은 경제안정화 종합시책의 연장선상에서 파악될 수 있다. 이 시책은 개발년대의 관주도 경제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한 바탕 위에서 경제를 민간주도의 운영체제로 개편하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정부측에서는 특히 제2차 석유파동 이후 드러난 기존의 성장우선주의와 불균형성장론의 문제점들이 공정거래법 제정의 배경이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원유가의 인상과 이에 따른 각국의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등 대외여건이 악화되자 수출이 둔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농산물의 흉작이라는 악조건이 겹친 1980년에는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다. [장상철. 1999. 한국의 개발국가, 1961-1992: 성장의 역설과 국가-기업관계의 변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79-80쪽]

비슷한 논지를 당시 공정거래법에 대한 경제기획원 차관 최창락의 제안 설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경제는 이제 시장이나 기업의 규모뿐 아니라 자본 기술 경험 등 모든 분야에서 크게 확충되고 성장되었으며 경제구조도 복잡하고 다양화됨으로써 종전과 같이 정부가 민간의 경제활동에 일일이 개입하거나 이를 직접 관리하는 것이 오히려 기업의 창의성을 저해하고 가격기능을 왜곡화시킴으로써 국민경제의 능률적 운용에 저해요인으로 작용할 우려마저 있게 되었습니다. [중략] 이러한 경제여건 변동에 부응하고자 정부는 앞으로 경제운용의 기본방향을 정부주도에서 민간주도로 점차 바꾸어 나감으로써 경제체질의 강화와 경제운용의 효율화를 추진시켜 나가고자 합니다. [중략]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안은 [중략] 경제운용방식의 전환을 촉진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법으로서 민간기업의 창의력과 자유경쟁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시장기능의 이점과 기능을 최대한 살려 경쟁을 저해하거나 왜곡시키는 행위를 규제하는 것을 그 골자로 하여. [후략] [국가보위입법회의 법제사법위원회 회의록 제19호(1980.12.22) 중 경제기획원 차관 최창락의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안 상정에 관한 제안 설명’. 장상철. 1999. 한국의 개발국가, 1961-1992: 성장의 역설과 국가-기업관계의 변화.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57쪽에서 재인용]

그러면 이제 이 법안의 주요 내용을 살펴봅시다. 공정거래법은 1981년 시행 이후 수십차례 개정을 거쳐왔는데요, 아래에서는 1981년 시행된 원안을 기준으로 보겠습니다.

제1조(목적) 이 법은 사업자의 시장지배적지위의 남용과 과도한 경제력의 집중을 방지하고, 부당한 공동행위 및 불공정거래행위를 규제하여 공정하고 자유로운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창의적인 기업활동을 조장하고 소비자를 보호함과 아울러 국민경제의 균형있는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3조(시장지배적지위의 남용금지) 시장지배적사업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행위(이하 "남용행위(濫用行爲)"라 한다)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다만, 제1호의 규정에 의한 남용행위의 금지는 시장지배적사업자중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사업자에 한한다.
1. 상품의 가격이나 용역의 대가(이하 "가격(價格)"이라 한다)을 부당하게 결정·유지 또는 변경하는 행위
2. 상품의 판매 또는 용역의 제공을 부당하게 조절하는 행위
3. 다른 사업자의 사업활동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행위
4. 새로운 경쟁사업자의 참가를 방해하거나, 일정한 거래분야에서 경쟁사업자를 배제하기 위하여 시설을 신설 또는 증설하는 행위
5. 기타 경쟁을 실질적으로 제한하거나 소비자의 이익을 현저히 저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
제4조(가격의 동조적 인상) 경제기획원장관은 제3조 단서의 규정에 의한 사업자 이외의 시장지배적사업자 2이상이 3월이내에 동종 또는 유사한 상품이나 용역의 가격을 동일 또는 유사한 액이나 률로 인상한 때에는 당해 사업자에 대하여 그 인상이유를 보고하게 할 수 있다.

우선 법의 1조 목적에서는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과 ‘과도한 경제력 집중’의 방지 ‘창의적 기업활동 조장’과 ‘소비자 보호’의 추구가 핵심적인 문구로 드러납니다. 시장지배적 지위의 ‘남용’이 무엇인지는 법 3조에서 정의하고 있는데요, 1호와 2호를 통해 시장에서 지배적 지위에 있는 기업이 마음대로 가격을 높이거나 공급량을 줄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주요한 목적임을 알 수 있죠. 원리상 공급량 감소가 가격 인상으로 직결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법 3조의 금지를 통해 추구하는 목표가 ‘물가 안정’이라는 점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공정거래법의 핵심은 ‘시장 지배력의 남용’ → ‘물가 불안정’이라는 인식 하에서, 시장 지배력을 남용해 물가를 교란시키는 여러 행위를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정거래법의 근거 중 하나는 당시 헌법(1980년 개정) 120조에 있었습니다. 이 120조는 대한민국 경제는 민간 경제 주체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국가는 일부 필요한 사항에 개입할 수 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로 독과점 폐단을 들고 있어요.

제120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시키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안에서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한다.
③독과점의 폐단은 적절히 규제·조정한다.

종합해보면, 공정거래제도는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한국 경제 정책의 가장 큰 목표인 물가안정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습니다. 1979년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경제 정책 전반의 지향과 거시적인 기반의 변화를 추구했다면, 1981년 공정거래제도 도입은 물가안정을 위한 미시적인 조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97년 4월 2일, 공정거래위원회의 새로운 CI가 발표되었다.
외환위기의 과정에서 공정거래위원회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해소해야한다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게 된다

끝으로, 공정거래제도를 둘러싼 최근의 가장 큰 쟁점인 ‘경제 민주화’에 대해서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공정거래제도는 여러 시장에서 지배적 지위에 있는 재벌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제도일 수밖에 없는데요, 예를 들어서 공정위는 매해 기업집단을 지정 및 관리하고 있죠. 경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현재에 이르는 동안, 크게 두 번의 역사적 계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980년대 후반 민주화 국면이었는데요. 그 결과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1988년에 개정된 헌법(9차 개헌)은 앞서 살펴본 헌법(1980년 8차 개헌) 120조의 내용을 변형하여 아래와 같이 119조에 그 목표를 ‘경제의 민주화’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제119조 ①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
②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였습니다. 재벌의 순환출자가 외환위기 당시 많은 기업의 연쇄적 도산의 배후에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순환출자는 재벌 총수가 소수 지분으로 많은 지배력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편법 수단일 뿐만 아니라 많은 기업들의 연쇄 도산 위험을 증대시키기 때문에 없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공정위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정책 중 하나는 재벌들의 순환출자 규제였죠. 이처럼 공정거래제도를 둘러싼 핵심 화두는 1981년 도입 당시에는 ‘물가 안정’이었지만, 1980년대 후반 민주화 국면과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거친 이후 현재에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집필자 | 오형석
중앙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사회학과 석사 및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연구 관심 주제는 1990년대 전후 한국 자본주의 구조 변동의 원인과 결과이다. 학위 논문으로 <한국 발전국가 전환과 1997년 한보사태>(박사논문)와 <한국의 신자유주의적 금융화에서 국가의 역할>(석사논문)이 있다. 현재 강릉원주대학교, 중앙대학교, 청운대학교(산업대학), 한서대학교에서 강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