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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에게 ‘IMF’로 기억되는 1997년 외환위기는 본질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발생한, 글로벌한 스케일의 사건이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1997년 아시아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원인과 전개과정, 결과와 그 의미에 대해 짚어봅니다.

1997년, 위기의 전파과정

최두열(1998)은 아시아 통화위기를 전개과정에 따라 크게 4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제 1단계에서는 태국에서 발생한 외환 위기가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주변의 동남아 국가로 전염된 단계다. 태국이 환율방어를 포기하고 자유변동환율제로 이행한 뒤,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도 같은 길을 따르게 되었다. 제 2단계는 동남아 통화위기가 동북 아로 전염되는 단계다. 대만의 뉴타이완달러(NTD)가 공격을 받자, 이미 변동환율제를 택하고 있던 대만 중앙은행은 환율방어를 쉽게 포기하였다. 이어서 홍콩이 공격을 받고 홍콩 증시가 폭락하는데, 이로 인해 홍콩발 단기부채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한국에 불이 붙게 된다. 제 3단계는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한국 등이 통화위기에서 탈출하는 가운데, 인도네시아가 위기의 중심이 된 단계다. 제 4단계는 아시아 지역의 위기가 전세계적으로 파급되는 단계다. 아시아 지역의 경기침체와 더불어, 이들 지역에 자연자원을 공급하며 수출의존도가 높던 러시아와 남미지역의 무역수지가 악화된다. 이는 다시금 국제투자가들의 자금도피를 일으켰고,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하게 된다. 위기는 동유럽 및 남미로 확산되고, 세계적인 경기침체로 이어지게 된다.

먼저 통화위기의 시발점이 된 태국은 플라자 합의 이후 일본 기업이 동남아에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해오고 있었다. 특히 오랜 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 1992년 연립정권을 수립한 태국은 자본자유화 조치를 확대하였다. 외국인투자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고정환율제를 실시하고, 외환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역외금융시장(BIBF)을 설립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일본의 경기침체 등으로 인한 금리하향 추세 속에서 외국자본이 대량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기에 수익성을 올릴 수 있는 주식시장과 부동산 등 자산시장에 버블을 형성시켰다. 새로운 자산스톡을 증가시키기보다는 기존 자산의 가격만을 상승시킨 것이다. 버블을 잡기 위해 태국 정부가 규제를 시도하자 부동산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지만, 부동산 기업의 파산, 관련 금융 기관의 부실화, 외국자본 유입 감소가 이어지며 금융시장의 불안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점차 바트화가 고평가 되어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태국 당국은 자본통제와 주변국과의 협조를 통해 96년 12월, 97년 2월, 97년 5월 세차례의 공격을 막아 냈으나, 점차 고갈되는 외환보유고를 버티지 못하고 7월 변동환율제로 이행한다. 변동환율제로의 이행으로 인해 그동안 환율 리스크에 대비할 필요가 없던 민간기업이나 은행들은 급하게 환율변동의 위험을 피하기 위한 우산을 찾게 된다. 통화스왑이 나 외화선물거래 등을 통해 환율변동의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달러수요를 증가시켜 환율붕괴를 가속화시 켰다. 결국 8월 11일, IMF와의 협상을 통해 172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기로 협약하는 한편, 금융재건청(FRA)과 자산관리 공사(AMC) 설립하여 채권 중심의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한편 말레이시아는 한국, 태국, 인도네시아 등보다 이른 1980년대 후반부터 자본자유화와 금융자유화를 추진해왔고, 고정환율제를 기반으로 FDI를 유치하는데 힘쓰고 있었다. 또한 1985년경 일찌감치 부동산 불황과 은행부실화를 겪었기 때문에, 보다 강화된 감독체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이나 재정적자 비율 등 거시지표도 건실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 역시 태국과 마찬가지로 고정환율제도를 택하고 있었고, 1990년대 중반 유동성 과잉을 바탕으로 부동산 경기 과열과 경상수지 적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투자붐은 건축 및 부동산 등에 집중되었고, 거대한 인프라투자 프로젝트가 잇따라 추진되었다. 1997년 5월부터는 태국발 통화불안의 불씨가 옮겨붙게 된다. 당시 마하티르 총리는 수차례에 걸쳐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국제적 투기세력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비난 이후 ‘시장감정’의 악화로 인해 외환과 주식시장이 불안한 상태를 지속했다. 당국은 투기적 공격에 대해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면서도 링기트화를 절하하는 것으로 맞섰다. 링기트화의 불안은 지속되었지만, 말레이시아는 IMF 구제금융신청을 거부했다. IMF에게 해결을 맡기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선택지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해법은 IMF 및 서구 국가들의 권고와는 반대로 자본이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투자된 지 1년이 되지 않은 외국계 자본의 해외반출을 금지했고, 수출대금을 모두 중앙은행에 맡긴 뒤 실수효 증명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만 외화를 바꿔줬다. 해외에서 유입되는 투자자금은 규제하지 않는 한편, 자국민의 해외송금 및 해외투자 규모를 제한했다. 통화제도의 측면에서는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는 한편, 링기트화의 해외거래를 금지했다. 당시 국제사회는 말레이시아의 고강도 외환정책에 대해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고 비난했지만 외환시장은 5개월 만에 안정세를 되찾았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2001년 5월 자본통제를 전면 해제했다. 무디스는 99년 4월 말레이시아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했고, IMF도 말레이시아의 정책이 유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환율제도 측면에서 인도네시아는 태국, 말레이시아와 달리 관리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통화제도를 비교적 탄력적이면서도 예측가능하게 운용하고 있었고, 경상수지를 비롯한 경제지표들은 건전한 편이었다. 그러나 태국이 변동환율제를 채택함으로서 인도네시아 역시 영향권으로 들어서게 된다. 7월 공격이 시작되자, 당국은 일일변동제한폭을 8%에서 12%로 확대 하였으나, 투기자본이 루피아화를 집중공격하기 시작하고 마침내 변동제한폭의 상한선을 돌파하게 된다. 8월 14일 당국은 자유변동환율제로의 이행을 발표하였고, 태국과 마찬가지로 민간부문 외채와 환리스크 헤지수요로 인해 절하압력이 배가되었다. 결국 구제금융을 신청한 인도네시아는 10월 30일 IMF와의 협상을 타결한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환율은 폭등하였고, 1월 20일 수하르토의 대선출마(7선 연임) 선언 이후 더욱 폭락하게 된다. 환율폭등으로 물가폭등과 생필품 품귀현상이 나타났으며,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정부는 통화위원회를 설치해 자본통제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미국와 IMF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98년 5월 4일 IMF 합의에 따라 연료비, 전기료, 교통요금 등 생필품에 대한 정부보조금을 철폐하자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이는 결국 1967년부터 인도네시아를 철권 통치해온 수하르토가 대통력직에서 하야하는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위기는 필리핀으로 옮겨붙었다. 국제 외환투기자들은 태국을 공격한 다음 필리핀 페소화를 공격했고, 필리핀 중앙은행은 페소화 폭락 열흘만에 고정환율제를 포기했다. 1997년 하반기에 페소화는 달러 대비 30%나 하락했고, 주가도 연초대비 35% 떨어졌다. 국제 투자자들은 필리핀을 인도네시아나 태국과 구별하지 않고 같은 범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하티르가 국제 자본과 대결을 벌일 때 필리핀 은행들이 불만을 터트린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필리핀은 비교적 적은 타격을 받고 1997년을 넘길 수 있었다. 이미 필리핀은 1980년대에 사실상 채무 불이행 상태에 빠져 IMF의 관리를 받고, 산업정책의 포 기와 상품·금융시장 개방 등의 조치를 실행해오고 있었다. 필리핀 국민들은 사실상 내핍을 강요받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덕에 버블의 전파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7월 2일 바트화 폭락을 시작으로 아시아 위기가 확산되자, 필리핀은 가장 먼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규모는 10억 달러로,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이 신청한 금액보다 훨씬 적었다. IMF는 필리핀이 요구한 구제금융을 즉각 지원했다. 필리핀에 대한 IMF 구제금융은 비록 적은 금액이었지만, 멕시코 페소화 위기 이후 IMF가 통화 위기에 처한 나라에 구제금융을 재개한 첫 케이스였다. 필리핀은 원래 1997년 7월 23일로 수십 년간의 IMF 간섭으로부터 졸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국에서 발원한 금융위기의 태풍이 몰아치자 필리핀은 IMF 졸업일을 연기 하면서 IMF의 보호막을 이용했다.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를 휩쓴 외환위기는 대만으로 북상하게 되었다. 7월 28일 대만 중앙은행은 타이완달러의 약간의 절하를 용인하였고, 이후 시장개입을 지속하였다. 그러나 불안이 지속되자 10월 17일 시장개입 중단을 선언한다. 태국 사태 이후 홍콩 역시 대규모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대만 중앙은행이 타이완달러에 대한 방어를 포기하자, 10월 20일부터 홍콩달러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홍콩 당국은 홍콩달러 차입에 필요한 오버나이트 금리 인상으로 맞섰지만, 이는 약 열흘간 이어진 홍콩 주가의 하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홍콩의 주식 및 외환시장이 불안정해지자, 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국제 투자자본의 철수가 가속화되었다. 그러나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폴 등 중화권 경제들은 1997년 위기에서 비교적 약한 충격을 받고 지나갈 수 있었다. 대만의 경우, 중소기업 중심의 유연하고 효율적인 유연생산체제, 막대한 외환보유고와 자본수출국으로서의 위치, 이와 연관된 정부와 기업의 낮은 대외부채, NTD의 조 속한 평가절하 등이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성장률이라는 측면에서 중국은 사실상 위기의 영향을 벗어나있었다. 풍부한 무역 흑자와 외환보유고, 금융자유화 및 외국은행의 영향을 차단한 방어벽, 환율과 신용에 대한 부분적인 통제경제, 여전히 내향적 성격이 강한 경제 등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외국자본과 연결된 국제신탁투자공사(ITICS)들이 위기를 겪거나 도산했지만, 경제 전체에 대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위안화 절하에 대한 압박에 불구하고 확장적인 재정정책 및 통화정책 으로 경기를 조절할 수 있었다. 대만이나 중국의 사례에서는 모두 금융제도를 규율할 수 있는 정부역량이 두드러진다. 홍콩은 대만이나 중국에 비해 훨씬 강한 압력을 받았지만, 금리인상을 통해 고정환율제도를 방어해내는데 성공했다. 그 배경에는 막 대한 외환보유고와 타이트한 금융감독, 그리고 무엇보다 중국과 나머지 세계를 있는 산업·금융·상업 허브로서의 역량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중화권 국가들은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영향력 하에 있었고, 이들은 IMF 체제 바깥에서 비시장적 개입을 통해 위기를 돌파할 수 있었다.

국제자본이 홍콩에서 철수하자, 홍콩 자금시장으로부터 외환조달 의존도가 높고 단기외채 비중이 높은 한국 금융기관과 기업 들의 외채연장률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한국에 불이 옮겨붙는다. 이미 한국은 1997년 초 한보, 삼미, 진로, 대농, 기아 등 재벌 기업들의 연쇄도산과 함께 신인도의 하락을 겪고 있었다. 10월 22일 기아의 공기업화 방침 발표, 23일 홍콩 주가폭락, 24일 S&P의 신용평가 하락과 더불어 한국은 본격적인 외환위기로 접어들게 된다. 조금 더 시야를 넓히면, 1993년 이후 한국은 태국, 인도네시아 등과 마찬가지로 급격히 국제금융시장에 편입되어 유동성 과잉을 겪고 있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UR 협상 및 OECD 가입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국제경쟁 격화로 인한 수출품 가격 하락, 자본유입에 따른 원화 고평가가 겹치며 수출부진이 심화되고, 기업 현금흐름의 이상은 금융부문의 부실로 전파되고 있던 상황에서 통화위기로 인한 충격은 위기를 전면적인 위기로 발전시켰다.

IMF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위기의 해결 과정은 IMF가 설립이래 표면적으로 내세워왔던 순수한 기술적 해결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IMF는 자금 지원의 ‘조건’으로서 거버넌스의 개혁을 요구했다. IMF의 구조개혁은 아시아의 금융시스템을 보다 서구적으로 만드는 한편, 자본계정 자유화, 무역 자유화,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했다. IMF가 요구한 긴축정책은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런데 아시아의 금융시스템을 서구적인 시스템으로, 즉 고부채에서 저부채 모델로 변형시키려면 이미 쌓여 버린 부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로버트 웨이드는 역사적으로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네가지 방법으로 인플레이션, 파산, 상환, 출자전환이 있었다고 한다면, IMF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을 강제했다고 평가한다 (Wade&Veneroso, 1998). 그러나 IMF가 내세운 반부패와 정경유착 철폐, 선진화 등은 매력적인 슬로건이었고, IMF가 제시한 중장기적인 제도개혁의 과제들은 IMF에 의한 ‘외압’ 뿐만 아니라 국내 다양한 세력들의 지지에 힘입어 추진되었다.

위기 이후 대부분의 국가들에서 사회적 위기와 국내정치적 변동이 이어졌다. 제도적 유산, 발전단계, 지리경제적 조건, 국내정치적 조건 등에 따라 위기의 처리방식과 효과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모든 국가들이 한국과 같은 ‘IMF 모범생’은 아니었고, IMF가 내세운 해법이 유일한 것도 아니었다.